[역경의 열매] 강효숙 (5) 도망 가듯 떠난 뉴욕에서도 새로운 삶의 갈증 느껴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강효숙 (5) 도망 가듯 떠난 뉴욕에서도 새로운 삶의 갈증 느껴

가족들이 항공료와 기타 경비 배상, 엄마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 힘들 때 위로해준 남자친구와 결혼

입력 2019-04-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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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결혼한 뒤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

긴장이 풀리면서 다시 세상구경을 하고 싶어졌다. 뉴욕으로 가는 길에 영화에서만 봤던 프랑스 파리에 들렀다. 15일간의 즐거웠던 파리 여행을 뒤로하고 뉴욕으로 출발했다. 치밀하게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일을 저질러 버리는 나의 습관은 타고난 천성이었을까. 그런데도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모든 과정을 보고 계시면서 간섭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나중에 주님을 영접하고야 깨달았다.

내가 로마에서 뉴욕으로 도망가는 동안 한국에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한국을 탈출할 생각에만 몰두하다 보니 나의 무모한 행동이 가져올 파장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연수를 끝내고 도주한 일이 알리탈리아 항공사 한국사무소에서도 얼마나 황망하고 난처한 일인지 전혀 생각을 못 했다. 옳지 않은 일이란 걸 알았기에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계획한 일이었다. 서울의 엄마와 결혼한 언니들이 쉬쉬하면서 항공료와 기타 경비를 배상했다. 엄마는 딸을 잘못 키웠다고,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고, 알았으면 딸을 타지에 보냈겠느냐면서 무수히 사과하셨다고 한다. 그때 엄마의 심경을 생각하면 아직도 죄송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불똥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남자친구에게도 튀었다. 그러잖아도 그의 부모는 나를 며느리감으로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참이었다. 여자애가 다소곳하지 않다고, 외아들을 번듯한 집에 장가보내고 싶었는데 아들 녀석이 영 말을 안 듣는다고 말이다. 내가 뉴욕으로 떠났다고 하니 그 집에서도 ‘그것 보라’며 난리가 났다.

그때는 해외에서 국내로 연락할 방법이 편지나 국제전화뿐이었다. 유럽에서의 이야기와 뉴욕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은 남자친구에게 편지로 써서 보냈다. 하지만 유럽에서 보낸 편지가 한 달 걸려 한국에 도착하던 시절이라 모든 사람에게 난 도망자였다.

어렵게 한국 탈출의 꿈은 이뤘지만, 뉴욕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친척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내가 해 본 일이라곤 6개월간 알리탈리아에서 배운 항공권 발권 업무뿐이었다. 나는 뉴욕 현지의 한국 여행사 중 이화여고 출신 선배가 운영하는 작은 여행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는 일은 단순했다. 고객이 항공권을 사겠다고 하면 대한항공 뉴욕지점에 가서 발권하는 것이었다. 대신 항공권을 10~50% 가격에 살 수 있어 어디든 여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세상구경 좋아하는 나는 그나마 그 덕에 삭막한 뉴욕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2년쯤 일하던 중 대한항공이 49번가 5번 애비뉴의 새 사무실로 이사하며 직원을 모집했다. 뉴욕 노선을 신설하며 야심 차게 뻗어 나갈 때였다. 안면이 있던 대한항공 지점장에게 “저만큼 발권 경력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요” 하면서 지원했다. 대한항공으로 직장을 옮겼다.

사실 뉴욕에서의 삶은 내가 서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얻어낸 만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내가 한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고민에 빠지고 우울해질 때가 많았다. 그때 남자친구와 주고받는 편지가 위로였고 외로움을 견디게 해 주는 보약이었다. 마침내 그는 종합상사의 뉴욕지사로 발령받아 나왔다. 결혼하기 위해 나왔다는 그와 10년 연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우리는 롱아일랜드에 살던 시누이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야외에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떠났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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