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10) 도망치는 것을 멈추게 한 큰딸의 한마디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강효숙 (10) 도망치는 것을 멈추게 한 큰딸의 한마디

홍콩 학교에서 갈등으로 힘든데도 “스스로 해결해 보겠다” 대견한 모습

입력 2019-04-2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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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때문에 하루 아침에 미국 뉴욕에서 홍콩으로 삶의 자리가 바뀐 뒤 두 딸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큰딸 수현이와 작은딸 수진이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다.

며칠 뒤 학교에 간 수현이가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학교에 나 좀 데리러 와 달라”고 했다. 수현이가 홍콩에 온 뒤 처음 내게 걸어준 전화였고 우리를 화해하게 한 첫 실마리였다. 하던 일을 미루고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기죽어 있는 녀석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수현이는 그간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꺼내놓았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친구들과 갈등을 빚던 중 그날은 친구들이 모두 한편이 돼 수현이를 비난했다고 한다.

“난 무조건 네 편이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학교 다니기 힘들면 전학 가도 돼” 하며 위로했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맛난 저녁을 먹는데 수현이가 놀라운 말을 했다. “엄마, 학교는 옮기고 싶은데 그래도 아이들과 잘 해결하고 다음 학기에 옮길래요.” 도망가지 않고 해결하겠다는 딸이 대견했다. 도망가는 나보다 낫게 느껴졌다. 내가 도망가는 일을 멈추게 한 사건이었다. 수현이를 바꿔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마음을 내게 보여주시고 나를 보고 딸을 보게 해 주신 하나님. 그렇게 아버지만의 방법으로 무너진 나를 괜찮다고 일으켜주시는 주님을 만났다.

수현이와 나는 그 후에도 수없이 다퉜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친구가 됐다. 수현이는 성적표 대부분을 C로 장식했지만 어디서든지 당당하고 무슨 일이든 어려워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덤벼들었다. 학업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 외에 관심도 없던 녀석인데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을 보더니 그와 동문이 되고 싶다고 했다. 뒤늦게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클린턴의 모교인 웰슬리칼리지 심리학과에 입학해 미국 보스턴으로 떠났다.

큰딸과 치열한 나날을 보내는 사이 둘째 수진이는 마치 홍콩에서 오래 살아온 아이처럼 자기가 할 일을 잘 감당하며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한 후 행동하고 결론 내리는 이성적인 아이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가방을 멘 채로 숙제를 끝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정확히 9시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에 성장한다는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고기반찬을 꼭 올려달라고 했다. 그 덕분인지 수진이는 173㎝의 훤칠한 키에 보기 좋은 이목구비로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고등학교 때는 모델도 하고 연극공연 무대에도 섰다. 동시에 학업도 우수해서 학생회장을 지냈다. 학부형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딸을 어떻게 키웠냐고 물어와, 내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늘 나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본인이 다 알아서 처리하고 내가 참견하고 싶어도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수진이는 한편으론 내게 버겁고 다가가기 힘든 딸이었다. 어느 날 A+가 가득한 성적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기에 “우리 딸, 천재 아니야”했더니 정색하며 반기를 들었다. “엄마, 난 그런 소리가 제일 듣기 싫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아? 언니가 엄마 속을 썩여서 내가 엄마를 기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엄마는 내겐 관심도 없이 언니만 사랑하잖아.” 이때 잘 알아들었어야 했다. 수진이라고 가슴에 멍이 없었을 리 없다는 것을. 큰딸은 반항으로 엄마에게 자기를 알아달라 한 것이고, 둘째 딸은 잘해서 칭찬받는 것으로 자기를 알리려 했던 것이다. 서로 표현방법만 달랐음을 그땐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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