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역사바로세우기 그리고 적폐 청산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역사바로세우기 그리고 적폐 청산

입력 2019-05-08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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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역사바로세우기가 없었으면
성공한 쿠데타 처벌할 수 있었을까
과거를 복기하는 목적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데 있어…
적폐 청산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져야


합법정부를 무너뜨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36년간 스페인을 지배했다. 이 기간 프랑코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반대파가 5만명에 이른다. 해외로 추방되거나 망명길에 오른 이는 30만명을 넘는다. 납치, 고문 등으로 희생된 피해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33개월간 이어진 내전에선 100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프랑코는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에 버금가는 파시스트 독재자다. 그럼에도 스페인은 흑역사를 청산하는 길을 마다하고 덮어버리는 길을 선택했다. 1975년 프랑코 사후 친프랑코파와 반프랑코파는 이른바 망각협정을 맺어 과거를 문제삼지 않기로 합의한다. 스페인의 경제적 번영이 타협을 이끌어낸 동인이었다. 1960년대 스페인은 고도 경제성장으로 ‘스페인의 기적’을 일궜다. 이런 분위기 속에 프랑코의 폭정이 덮이는 듯했다. 하지만 덮는다고 덮이면 역사가 아니다. 애초 망각협정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시도였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늦었지만 정부 차원의 과거 청산 작업이 이루어진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4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치 잔당을 추적, 처벌하고 있다. 그들이 있는 곳이면 모스크바든 리우데자네이루든 지구 끝이라도 간다. 나치범죄중앙수사국으로 불리는 ‘국가의 사회주의 범죄 수사를 위한 법무·행정 중앙사무국’이 이 임무를 맡고 있다. 독일은 한발 더 나아가 2011년 나치 전범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앴고, 목격자 증언만으로 홀로코스트 방관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했다.

나치범죄중앙수사국은 매년 평균 30명을 법정에 세운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최근 법정에 선 피고인 상당수가 90대다. 2015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94세의 전 나치 친위대원이 법정에 섰을 때 독일 내에서 “90대 노인을 꼭 법정에 세워야 하느냐”는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과거 청산은 어느 수준까지, 언제까지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독일 국민은 “끝까지”라고 답했다. 자비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독일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나치 전범들을 충분히 처벌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우리의 일제 잔재 청산은 미완으로 끝났다. 시도는 있었으나 좌절의 쓴맛만 봤다. 반민특위는 1년도 안 돼 해체됐고 부일(附日)파는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광복된 조국에서도 잘나갔다. 이들의 생존논리는 명료했다. “우리 아니면 정부를 누가 이끄느냐”고. 그리고 함께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며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잽싸게 신분을 세탁, 군과 경찰 등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었다. 그 결과 독립군, 광복군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꿰차고 들어 앉았다.

최린은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나 일제에 굴복한 대표적 친일파다. 그는 반민특위 재판에서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참회했다. “노모에게 불효할 수 없어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친일의 변을 늘어놓은 그였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청산이다. 적폐 청산은 문재인 대통령 공약 1호이자 국정과제 1호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줄기차게 이어지면서 피로감을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들의 논리는 “경제도 어려운데 언제까지 과거만 들출거냐”로 귀결된다. 문 대통령도 지난 2일 사회원로와의 오찬간담회에서 “이제 적폐수사는 그만하고 좀 통합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참회해야 마땅할 부일파가 살아남기 위해 내세운 전략이 통합의 논리였다.

적폐를 공권력에 의한 범죄 또는 부당한 행위로 정의한다면 시시비비를 가려 역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가 있었기에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었다. 그때 통합을 명분으로 과거를 덮었으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논리가 여전히 유효할지 모른다. 공권력에 의한 범죄는 그 피해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칠 정도로 광범위하고, 심대하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면 이런 일은 언제든지 재발한다.

정치보복 프레임으로 적폐 청산을 폄훼하는 시도들이 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를 따르던 측근의 입을 통해 진상이 밝혀지고 있다. 없는 걸 만들면 정치보복이 맞는다. 그러나 객관적 증거와 진술을 통해 혐의가 명백한데도 덮는다면 정부의 직무유기다.

적폐 청산의 궁극적 목적이 단죄에 있어선 정치보복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죄에 상응하는 벌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사건에 대한 역사적 정의(定義)가 우선돼야 한다. 과거를 복기하는 일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데 목적이 있다. 적폐 청산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져야 한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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