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지혜] 젊음이 떠난 자리 지혜가 남기를

국민일보

[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지혜] 젊음이 떠난 자리 지혜가 남기를

입력 2019-05-1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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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사진작가 이광우의 사진 묵상집 ‘그 나라’에 수록된 ‘80대 소녀’. 이광우 제공

“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란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아프리카의 지성’으로 불리는 소설가 아마두 함파테바가 1962년 유네스코 연설에서 “아프리카에서 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알려진 명언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노인이 가진 지식이 도서관에 버금가며, 평범한 노인이라도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노인이 지혜로울 수 있다고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이 듦에 따른 경험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대체로 젊은 사람들에 비해 지혜 형성의 중요한 요인인 ‘축적된 경험’이 있다. 경험이란 무형의 자산이며 ‘지혜’이다. 따라서 한 인간의 경험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살아있는 도서관’이 된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 한 명의 죽음은 금세 잊히는 슬픈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맞이하는 노인들의 삶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라

“때론 불행했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드라마 ‘눈이 부시게’ 스틸. 주인공 김혜자가 샤넬 할머니를 보고 웃고 있다. JTBC 제공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명대사이다. 최근 백상예술대상을 받은 탤런트 김혜자씨가 수상 소감으로 다시 한번 전해 깊은 울림을 줬다. 드라마 주인공 혜자처럼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졸지에 70세 노인이 돼버린 25살 여자의 처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중에서야 모든 일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혜자의 선망이었음을 알게 됐지만 젊음과 늙음, 그 서서히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서서히 채워져야 할 기억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았다.

나이가 들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한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젊었을 땐 거뜬히 즐길 수 있었던 운동들이 갑자기 힘들어져 할 수 없을 때, 매일 먹는 약의 종류가 늘어날 때, 무릎 관절이 아플 때, 더 이상 밤에 운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 한쪽 발에는 갈색 신발을 다른 쪽 발에는 검은색 신발을 신고 있을 때 자신이 늙었다고 자각한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유대인 작가 아브라함 헤셀은 “나이 듦은 패배가 아니라 성공이며 형벌이 아니라 특권이다. 마치 대학에서 최고 학년이 되는 것처럼 인생의 완성을 이룬다는 기대를 품고 노년을 맞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생애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전지처럼,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촛불처럼 인생은 유한하다. 이런 우리의 인생이 눈부시려면, 바다에 떨어진 황혼처럼 눈부시게 떠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명 세우기

노년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년기란 인생의 하향길이 아니라 인격의 통합을 이루는 절정의 시기로 봐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창작활동이 왕성한 시기로 오히려 중년기보다 원숙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노년기는 단순히 돌봄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아니라 이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통해 사회통합과 가정의 행복을 이끌어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심리학자들은 노년기의 발달과업으로 타인과의 화해를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따라서 마음이 아팠던 일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화해를 청하라고 권면한다. 살아오면서 마음에 쌓인 부정적인 감정들과 화해하고 용서해야 통합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나는 어떤 세계에 있는 어떤 존재이며 그래서 나는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주체적인 삶을 살려면 이 질문에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삶의 지혜이다.

‘일터 신학’의 선구자인 폴 스티븐스는 나이가 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영적 여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서 ‘나이 듦의 신학’에서 “나이 듦은 은퇴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기회이며,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성숙의 과정”이라면서 “은퇴 이후의 삶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소명의 재발견으로 인생 후반기를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상상력으로 일상의 영역을 아우르기 위해 평생 글을 써온 그는 ‘나이 듦의 신학’을 78세에 집필했으며, 81세가 된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성경에서 노인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이며, 존경을 받으며 해야 할 역할이 있는 존재이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고 했고 “너는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32)고 했다. 또 노인은 지혜자의 역할을 감당할 책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정의를 다음세대에 전할 사명이 있다.(시 71:17~18) 노년기의 노화 과정은 상실과 쇠퇴의 시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해 겉 사람이 후패해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고후 4:16) 성숙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 듦이란 시간을 잃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얻는 것이다.

지혜는 노인이 되었다고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해야 얻어진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지속적인 도움과 축복을 구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 71:9)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구하는 이유는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시 71:18) 위해서이다.

신앙은 노년을 새로운 모험과 축복의 길로 인도해준다. 이론적으로는 나이가 들면 느긋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영성이 깊어진다고 한다. 나이가 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영적 훈련이나 영적 여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노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향한 공감과 사랑의 정서, 자기성찰의 의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성의 전인적인 통합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토대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면 우린 노년의 지혜를 선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혜에 하나 더
‘의미있는 삶’을 위한 질문


세계적인 기독교변증가 오스 기니스는 만족스러운 삶에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 사명과 목적에 대한 강한 인식,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처음의 두 가지 요건은 마지막 요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의미있는 삶을 만들기 위한 질문들이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했던 중대 사건들은 무엇인가.

-생활에서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은 무엇인가.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하면서 가치 있었던 활동들은 무엇인가.

-어떤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가.

-현재 하고 있는 일, 미래에 하고자 하는 일이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가.

-사람들이 어떤 인물로 기억하길 바라는가.

-장례식에서 자신의 업적에 관해 어떤 추모사가 나왔으면 하는가.

-앞으로 수명이 1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사람들에게 삶의 전환점과 관련하여 도움을 주고 싶다면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은가.

-만일 삶을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다르게 하고 싶은가.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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