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네스카페·스타벅스·블루보틀… 다음 커피는?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네스카페·스타벅스·블루보틀… 다음 커피는?

입력 2019-05-10 04:03 수정 2019-05-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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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부터 핸드드립까지 세 가지 물결을 거친 커피는 시대를 반영하며 진화해왔다
다가올 네 번째 물결 주인공은 제3세계 커피농부일 수도
커피시장 착취구조 완화해줄 ‘와인 같은 커피’…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이동통신의 변천은 세대(3G·4G·5G)로 구분하고 자율주행차의 진화는 레벨(0부터 5까지)로 나누는데, 커피는 물결이란 표현을 쓴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서 차용했을 이 용어는 미국의 원두 수입업자 티모시 캐슬이 1999년 처음 제시했고, 2003년 커피전문지에 실린 트리시 로스겝의 글을 통해 지금의 용례로 굳어졌다. 당시 노르웨이 커피회사에서 일하던 로스겝은 오슬로에서 열린 바리스타챔피언십 대회를 지켜본 뒤 “커피산업에 제3의 물결이 시작됐다”고 썼다.

커피의 진화라는 게 사람들의 일상에 서서히 젖어드는 변화여서 그렇게 말했지 싶은데, 아무튼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는 그동안 세 차례 커다란 물결을 겪었다고 한다. 각각을 대표하는 브랜드를 떠올리면 쉽다. 먼저 네스카페, 다음은 스타벅스, 그 다음은 블루보틀.

1903년 일본계 미국인 사토리 가토가 분말식 인스턴트 커피 공법의 특허를 냈다. 맛은 꽝이어서 설탕 둘, 프림 둘이 필요했지만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편리함에 엄청난 시장이 생겼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장의 병사들에게 이 커피를 주려고 브라질 원두를 싹쓸이했다. 브라질은 미국 수요를 겨냥해 커피 재배를 늘렸는데 너무 많이 늘렸다. 1930년대 원두가 남아돌아 네슬레에 가공을 의뢰했고, 이때 탄생한 브랜드가 네스카페였다. 곧 2차 대전이 터져 미군에 납품된 네스카페는 전선(戰線)을 따라 세계로 퍼지면서 인스턴트 커피의 대명사가 됐다.

첫 번째 물결은 커피가 아니라 카페인을 소비했다고들 말한다. 품질보다 편의성이 중요했던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시대상이 반영됐다. 인스턴트 커피는 집과 사무실에서 마시는 음료였다. 1970년대 와서야 사람들은 “커피 한 잔 하러 가자”고 말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물결은 커피를 매개로 공간을 파는 것이었다. 풍요를 선사한 경제성장은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을 더 바쁘고 피곤하게 만들었고, 휴식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 공간을 제공한 스타벅스는 급속히 성장했다. 커피빈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갔다. 맛으로 승부하기 위해, 고객이 커피에 집중하도록 매장에서 콘센트와 와이파이를 제공하지 않다가 뒤늦게 스타벅스를 벤치마킹했다.

20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한 블루보틀은 ‘느린 커피’로 시장을 두드렸다. 두 번째 물결과 함께 바리스타란 말이 보편화됐지만 스타벅스에서 실제 커피를 만든 건 에스프레소 머신이었다. 핸드드립 방식인 블루보틀 커피는 바리스타가 직접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10분에 걸쳐 한 잔을 우려낸다. 지난주 서울 성수동에 한국 1호점이 문을 열자 수백명이 줄을 섰고 3시간, 5시간씩 기다려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 매장은 커피빈이 그랬던 것처럼 콘센트와 와이파이가 없으며 의자는 딱딱하다. 안락한 공간 대신 커피의 품질과 원두의 생산과 로스팅 기법에 얽힌 이야기, 즉 차별화된 경험을 칵테일 쇼 같은 바리스타의 퍼포먼스에 담아 팔고 있다.

서울에 스타벅스 1호점이 문을 연 것은 1999년이었다. 꼭 20년 만에 제3의 물결을 상징하는 커피가 왔다. 스타벅스는 한국에서만 20년간 1200개 매장을 열었는데, 블루보틀은 미국에서 20년간 50개 매장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물결이라 하는 것은 스텀프타운, 인텔리젠시아, 카운터컬처 같은 유사한 브랜드가 폭넓게 확산되고 있어서다. 제1의 물결은 편리한 각성효과에 대한 욕구, 제2의 물결은 바쁜 일상의 쉼표에 대한 갈망, 제3의 물결은 다양성에 대한 갈증이 몰고 온 변화였다.

현대인과 뗄 수 없는 커피는 기호품이다. 커피의 유행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준다. 시대상을 오롯이 투영하며 변모해 왔기에 어떤 커피를 마셨나 보면 그 시절이 어떤 세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럼, 앞으로 마시게 될 커피를 미리 안다면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게 될지 가늠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커피업계에선 벌써 네 번째 물결을 논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설이 있는데, 커피가 와인처럼 돼간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바디감, 밸런스 같은 와인 용어가 커피 설명에 활용되고, 와인 고를 때 포도 품종 따지듯 여러 품종을 섞는 블렌딩 커피보다 싱글 오리진 커피가 각광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에스프레소 머신과 바리스타에 이어 커피 생산자가 다음 물결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들 한다. 프랑스 포도농장을 찾아다니는 와이너리 투어처럼 콜롬비아나 네팔의 커피농장으로 휴가를 떠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물결의 브랜드로 거론되는 캐나다의 제이제이빈 커피는 원두를 납품받는 남미 커피농장에 해마다 바리스타들을 보내고 있다. 농부들이 더 나은 조건에서 더 좋은 커피를 생산하도록 작업환경 개선을 지원하고 학교도 지어준다. 커피는 오랜 세월 제3세계 착취구조 속에서 공급돼 왔다. 와인 같은 커피가 정말 물결이 된다면 이를 상당부분 해소하는 공정무역의 일상화를 뜻하는 것일 텐데, 꽤나 근사한 상상이지 않은가.

태원준 논설위원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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