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어렵게 들어간 대학… 빈곤의 고통, 꿈으로 극복

국민일보

[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어렵게 들어간 대학… 빈곤의 고통, 꿈으로 극복

<2> 총신대, 도약 향한 걸음

입력 2019-05-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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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왼쪽 세 번째)가 1979년 8월 강원도 원주 성광원 맹인촌 하계 봉사활동에서 화장실을 짓기 위해 단원들과 일하는 모습. 세계밀알연합 제공

내가 총신대에 입학한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총신대는 내게 소중한 것들을 가져다준 특별한 곳이다.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큰 변화와 성장의 계기가 됐고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됐다. 그토록 좋은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총신대를 쉽게 내어주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어렵게 입학을 하게 하신 다음에도 대학 생활에 또 다른 어려움들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일상생활은 물론 학업 수행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어디든 쉽게 가지 못했고 읽고 싶은 책들을 제때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다. 같은 분량을 공부하는데도 남들보다 열 배는 더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이었기에 고문처럼 고통스러웠다.

장애인 선교 향한 비전

그런 중에도 장애인 선교에 대한 비전은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고 기도와 염원은 더욱 간절했다. 초기 대학 생활은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장애인 선교의 비전을 구체화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마음속은 언제나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중에 이러이러한 선교단체를 만들려고 하는데 함께 일할 생각 없어?”라며 은근히 동조자를 찾으려는 시도도 계속했다. 대개는 그 말을 웃어넘겼다. 비웃는다기보다는 내 처지로 보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런 말에, 아니라고 대답하기는 미안하고 그래서 그냥 웃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던 것 같다. “아, 그래! 그러면 나 부장 하나 시켜줘”라며 빈정대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그런 말들이 다 씨앗이 돼 현실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총신대 1·2학년 때는 비교적 공부에 주력했다. 덕분에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 어려운 경제 사정에 크게 도움이 됐다. 사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과목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싫어하는 과목은 아예 무시해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싫어하고 적성이 맞지 않은 공부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 외국어 역사 철학 윤리 같은 문과 계통의 것들이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즐겁게 공부하는 과목들이었다. 그런데 신학대에 와보니 체육과 음악만 빼면 내가 좋아하는 과목들만 잔뜩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갈증 난 사람이 시원한 물을 마시듯 정말 재미있게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었다. 내가 공부를 못하면 “장애인이니까 당연히 못 하는 거겠지”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가장 싫었다. 나 때문에 다른 장애인들까지 무능한 것으로 취급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모든 과목에서 항상 A학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부를 참 잘하는 학생이구나”라는 인식을 주변에 심을 만큼은 했던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쌓았던 게 나중에 밀알선교단을 창립하고 이끌어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내게 자신감으로 작용했고 누구를 만나도 스스로 위축되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해줬다. 같은 학생 신분이면서도 또래의 학생들을 리드해 하나의 단체를 설립하는 데 큰 배경과 힘으로 작용했다.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왼쪽)가 1981년 2월 총신대 졸업식 때 형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세계밀알연합 제공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거처

1978년 가을 학기의 대학가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걸핏하면 휴강이고 시험은 리포트로 대체됐으며 겨울방학은 11월 초부터 시작됐다.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혹시 데모라도 할까 봐 쫓겨나기 일쑤였다. 기숙사에서 나와야 하는 나는 어디 적당히 가 있을 곳이 없었다. 시골집은 그해 11월 집안의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팔려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집이 불과 73만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많이 울었다. 서울엔 친척도 없었고 친구 집도 하루 이틀이지 겨울방학을 지낼 만큼 길게 있을 곳은 아니었다. 돈을 주고 방을 얻는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아주 서럽고 외로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겨울 내가 지낼 거처를 예비하고 계셨다. 바로 연합세계선교회 사택이었다.

연합세계선교회는 미국에 본부가 있는 단체로서 시각장애인과 혼혈아를 돕는 선교기관이었다. 선교회는 상도동에 큰 집 한 채를 사택으로 보유하고 있었는데 ‘매일성경’을 보급하는 성서유니온이 그때 무상으로 빌려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선교회 회장인 플릿 크로프트 선교사님이 그 집 뒷방 하나를 방학 동안 내가 지낼 수 있는 거처로 허락해 줬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던 12월 18일 그 방으로 이사해 들어갔다. 온돌이 없는 방이라 연탄난로를 하나 설치했지만 두 면의 벽이 커다란 창문으로 돼 있어 몹시 추웠다. 그러나 그 집의 거실이 바로 1년 뒤 밀알선교단 창립의 역사적인 현장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바로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 방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재서 박사

정리=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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