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하늘 가는 밝은 길 내 앞에 있으니…” 울돌목 바다, 순교지 되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하늘 가는 밝은 길 내 앞에 있으니…” 울돌목 바다, 순교지 되다

순교자 오교남 전도사와 진도 울돌목

입력 2019-05-1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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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바라본 벽파교회. 반대편이 벽파항과 명량해전의 울돌목 바다이다. 이 교회 동산 자락에는 이충무공전적비와 그가 해전을 지휘하던 벽파정이 있다.

가닥이 잡히지 않는 취재 길이였다. 순교자 오교남 전도사의 스데반과 같은 죽음을 기록하기 위한 여행이었으나 단서가 부족했다.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교회와 그곳 정원의 순교자기념비가 유일한 끈이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기록은 딱 한 줄이었다. ‘소속, 납북일자 또는 순교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분류에 ‘오교남 벽파교회 전도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에 관한 사료는 고사하고 구전도 찾을 수 없었다. 생몰도 알 수 없었고, 사진 한 장도 없었다. 이렇게 사료가 부족한 인물을 왜 한국교회는 순교자라고 확정 지었을까.

오교남뿐만 아니라 수많은 순교자가 사료 부족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찾아내지 못한 사료가 유실되고 증언자마저 죽으면 신화화됐다.

오교남 전도사 (1927~1950)

오지 섬마을 순교자 사료 첫 공개

그런데도 지난 9일 길을 떠났다. 벽파교회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지휘하던 벽파정이 자리한 해안 암반 산등성이에 있었다. 출발에 앞서 벽파교회 정순경 목사의 도움으로 오교남의 동생 오석교 은퇴 목사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80대 후반 고령 등 여러 여건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교남은 분명 6·25전쟁으로 좌익들에 의해 희생됐다. 해당 교회 교인들이 겪은 참혹한 일들을 소속 교단인 예장통합 목포노회 등에 알렸고 이것이 당회록, 노회록 등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역사 인식이 부족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러한 사료들이 소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1973년 교인들이 직접 벽돌을 빚어 지은 벽파교회.

벽파교회는 아름다웠다. 1973년 벽돌로 지은 자그마한 예배당에 5월의 봄 햇살이 가득했다. 새순이 돋기 시작한 배롱나무와 활짝 핀 철쭉꽃 등이 어우러진 정원에 순교기념비가 다소곳했다. 허리춤 높이의 ‘오교남전도사순교기념비’. 측면에 ‘이영래 집사 세우다’라고 되어 있다. 순교자의 약력도, 세운 날짜도 없는 간결한 기념비였다. 이영래는 현 벽파교회 박성철(63) 장로의 할머니이다.

순교자에 대한 기억과 증언. 90대 주나단 권사.

박 장로는 이 마을 출신으로 자신의 손자까지 포함하면 5대째 섬기는 중이다. “교회를 두고 뭍으로 갈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안내로 오교남을 기억하는 주나단(92) 권사 집을 찾았다. 주 권사는 벽파교회 설립자 정애심(작고) 권사의 권유로 예수를 믿고 한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바다 건너 해남에서 시집왔다.

울돌목과 벽파정. 명량대첩 현장이자 오교남 일가 수장 바다이다.

“사변이 나고 (좌익들이) 오 전도사를 끌고 갔어. 배에 태워 저 울돌목 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빠뜨려 죽였어. 오 전도사님이 (죽음 앞에) 체념하고 찬송을 불렀어. ‘하늘 가는 밝은 길이’(493장)였어.”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옛 예배당이 지금도 남아 민가(아래)로 사용된다. 흑백 사진 속 인물은 설립자 고 정애심과 증언자 주나단 권사로 추정된다.

홀로 사는 주 권사는 같은 말을 몇 번씩 계속했다. 자신의 밭을 내어 헌당한 정 권사 집 문간방에 살았다고 했다. 새벽기도를 빼먹지 않던 이 하나님 일꾼은 이제 바깥출입조차 쉽지 않다.

“아기가 불쌍해. 두 살 먹었는데 애 엄마와 함께 밀어 넣었어. 애 엄마가 덕석(무명 기저귀를 지칭한 듯)으로 (아기와 같이) 몸에 두르고 수장됐어. 그놈들이 저 앞바다(울돌목)에 싣고 가서….”

그 사모는 김정순(순교 당시 22세 추정), 아들 은선(2세)이었다. 김정순은 죽더라도 아들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저귀를 끈으로 만들어 동여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신도 못 찾을 뿐 아니라 어린 시신이 물고기 밥이 되었으리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로 추정되는 오교남 선교사 추모예배 직후 추모비 앞에서의 사진. 아래는 지난 9일 찍은 같은 장소다.

박 장로에 따르면 1970년대 오석교 목사가 참여한 가운데 몇 차례 추도예배가 있었다고 한다. 추모비는 이 과정에서 세워진 듯하다. 1971년 부임했던 김정명 목사(작고)는 회고록에 ‘초대 목회자 오 전도사 일가족이 순교를 당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사료를 남겼을 것으로 보이는데 미자립 시골교회이다 보니 목회자가 자주 바뀌면서 유실됐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명 목사는 전임자가 ‘오교남 최영기 함마리아 양윤기 주남옥 김행복 주춘옥 손천만 차성덕 한행섭 최길용’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그는 ‘목회자 사택 무쇠솥 안이 녹슬 만큼 목회자와 성도가 함께 굶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두 살배기 물고기 밥 면케 하려…

정 목사는 박 장로와 함께 오교남의 사료를 모았다. 원사료를 텍스트화한 오교남 부분 당회록이 나왔고 박 장로 앨범을 뒤진 끝에 그의 얼굴 사진도 발굴할 수 있었다.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1949년 11월 오 전도사님이 취임하여 가족 동반하여 전적으로 눈부신 활약하여 교인들과 성전건축에 합일을 보자 설립자인 정애심씨가 교회기지를 희사하며 교우일동이 전심전력함으로 마침내 1950년 3월 21일 벽파교회를 신건축하였다… 1950년 8월 18일(음력) 소나무의 바람소리조차 없는 잔잔한 바닷가의 유달리 밝히 비치는 고요한 밤중 그 누구도 모르게 천추의 불멸할 주의 뒤를 계승하려는 듸모데 같은 젊은 종을 무자비하게 잡아다 죽여! 오호애석다. 주의 종이여!’

오교남은 전남 무안 태생으로 14세 되던 해 무안 호동교회에 출석하며 예수를 영접했다. 1943년 서성일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몽탄공립학교 졸업 후 그는 순천철도국 역원 채용에 합격해 근무했고 1945년 4월 김정순과 결혼했다. 건실한 교회 청년이었던 그는 1947년 소명을 받아 목포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고, 이 무렵 벽파교회 주일학교에서 실습했다.

벽파교회는 1945년 11월 목포중앙교회에서 열린 심령대부흥회에 참석한 정애심이 벽파로 돌아와 자신의 집에 기도처를 두게 되면서 시작됐다. 진도중앙교회 김주환 목사와 채길용 전도사가 순회예배를 드리곤 했다. 이곳에 미국 남장로회 목포선교부가 1949년 11월 오교남을 파송했다. 1950년 3월 오교남 정애심 등에 의해 헌당 된 예배당이 지금도 남아 있다. 비록 가정집으로 쓰이나 50년대 섬 지역 교회건축물을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성전이 아닐 수 없다.

1950년 지은 옛 예배당(오른쪽)과 멀리 현 예배당(붉은색 원내).

벽파리 마을에는 1950년과 1973년 헌당 된 벽파교회 예배당이 동시에 현존한다. 벽파정 아래 벽파항은 1980년대 초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진도를 출입하는 관문이었다. 이 바다, 이순신이 왜구를 수장했던 울돌목에 민족이 민족을 수장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순례길이 아닐 수 없다.

순교를 이유로 후원금을 걷어 내용도 없는 기념관을 짓는 것이 한국교회 현실이다. 사라져 가는 사료를 발굴하고 후대에 남겨주는 일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하는 소망을 벽파정에 앉아 간구했다.

진도=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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