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역만 세 번째… ‘고도’ 의미는 희망”

국민일보

“블라디미르 역만 세 번째… ‘고도’ 의미는 희망”

극단 산울림 창단 50주년…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연 정동환

입력 2019-05-1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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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웅 연출가의 초연 50주년 기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 역을 맡은 배우 정동환. 그는 “연극에는 오락적 기능 외에도 인간의 삶이 깊게 담겨 있다”며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일수록 더 특별하고 귀해질 것 같다”고 했다. 권현구 기자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Korean Godot Worth the Wait).”

1990년 10월의 어느 날, 사뮈엘 베케트의 고향 아일랜드 더블린의 신문 아이리시 프레스 1면엔 이런 헤드라인이 붙었다. 현지 연극제에서 임영웅 표 ‘고도를 기다리며’를 선보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당시 무대에 올랐던 배우 정동환(70)은 “더블린 전체가 난리가 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회상했다.

극단 산울림 임영웅(83) 연출가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초연 50주년 기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베케트의 대표작으로 1969년 임 연출가가 한국에 첫선을 보였다. 그 후 지금까지 1500회 공연에서 22만명의 관객을 만났다. 이 극을 계기로 극단 산울림이 태동했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1989) 등 유수의 연극제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극은 황야 위에서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얘기를 그린다. 고도가 대체 누구고, 왜 기다리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의미 없는 대사가 이어질 뿐이다. 난해하다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던 이유다.

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블라디미르 역의 정동환을 만났다. 같은 역으로 세 번째 무대에 섰다. 대학생 때 처음 이 극을 봤다는 그는 “계속 나를 따라다닌 작품 같다”고 했다.

“분명 어려운데, 왠지 모르게 재밌었어요. 특히 배우들의 무대 위 놀이가 굉장히 즐거워 보였습니다.”

처음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을 때는 임 연출가와 매일 6시간씩 대본 리딩을 하면서 암호 같던 대사가 점차 몸에 스며들었다고 한다. 동적(動的)인 무대는 까다로웠다. 그는 “계속 뛰어다녔던 기억밖에 없다. 공연이 끝나면 물에 넣었다 뺀 것처럼 옷이 땀에 젖어 꼭 짜줘야 했다”며 웃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30대의 패기 넘치던 젊은 연출가는 이제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고 휠체어에 의지하게 됐다. 임 연출가는 총괄적으로 무대를 점검하는 역할을 하고, 조연출에게 대부분의 연습 진행을 맡겼다.

“이번 공연이 50년 전의 극을 똑같이 표현하는 재연에 그치지 않길 바랍니다. 앉고 서는 것 하나에도 이 시대의 고도를 위한 고민을 담는 게 임 선생님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정동환에게도 데뷔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이해랑연극상 등을 수상한 베테랑인 그는 매해 여름과 겨울에 연극의 원류(源流)인 그리스 등지로 떠난다. 체력을 위해 평소 산타기를 즐기는 것도 모두 연극이라는 한 지점을 향해 있다. 정동환은 “나이에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좋은 작품을 언제든 잘 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2019년의 고도는 어떤 의미일까. 정동환은 “세 번째 공연이 돼서야 확연해진 느낌이 있다”고 했다. ‘희망’이었다.

“황야에도 없는 게 없습니다. 생명이 있고, 기다림이란 희망이 있습니다. 한 그루여도 나무가 있죠. 그리고 고도는 내일에만 옵니다. 풍요 속 빈곤을 말하는 우리에게 내일이 아닌 오늘 속에 모든 게 들어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지 않나요.”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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