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봉영식] 줄리엣, 홍길동, 꽃게탕

국민일보

[한반도포커스-봉영식] 줄리엣, 홍길동, 꽃게탕

입력 2019-05-20 04:03 수정 2019-05-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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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정부는 ‘말’의 정확한 사용을 강조해 왔다. 사실관계를 오도하거나 애매하고 부정확한 이름을 사용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3·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사에서는 일제가 민족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용어인 빨갱이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개탄했다. 이번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아직도 5·18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망언들이 거리낌 없이 큰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는 현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이름을 바로 세워야 모든 게 바로 된다고 공자가 말했다. 문재인정부의 엄정한 자세는 공정한 사회, 정확한 정책의 실현을 위해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에 예외가 있다. 문재인정부는 북한 앞에만 서면 갑자기 변해 버린다.

지난 3월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외신을 인용하면서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 달라”고 발언하자,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국가 원수 모독죄에 해당한다”고 공격했다. 이해식 민주당 대변인은 나 원내대표가 인용한 블룸버그통신을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비방했다가 거센 후폭풍에 직면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비핵화라는 단어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국가와 인민의 근본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문 대통령은 시정연설을 두고 “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김 위원장이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을 철저히 이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해석했다.

북한은 지난 4일 신형 전술유도무기와 방사포를 시험발사했다. 이를 놓고 군과 정보 당국의 분석이 오락가락했다. 오전 9시 합참의 첫 발표는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동쪽 방향으로 발사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40분 후 합참은 북한이 쏜 기종을 단거리 발사체라고 정정했다. 오후 4시쯤 국가정보원은 “이번 발사체는 발사 고도가 낮고 거리가 짧아 미사일일 가능성은 작다”고 했다. 북한이 연이어 9일 추가로 ‘발사체’ 실험을 하면서 그 사진을 공개했고, 미국 정부와 미사일 전문가들이 이를 단거리 미사일 시험으로 언급하면서 한국 정부의 입장은 더욱 애매해졌다. 47조원의 예산을 쓰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방부가 발표할 수 있는 내용이 ‘불상 단거리 발사체 시험’ 정도라면 그 위기대응 능력과 분석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냐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면 유엔안보리 결의안(2006년 1695호, 2009년 1874호, 2017년 2397호)에 따라 추가 대북제재가 발동하게 된다. 따라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대화의 동력을 확보하려는 문재인정부는 북한의 신형 전략무기 시험의 파장을 관리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미사일이든 발사체든 이름이 뭐 상관있느냐,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똑같이 향기로울 거라는 줄리엣 정부가 되기로 했다. 미사일을 미사일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 정부는 서자로 태어나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정부가 되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이 시험발사한 것은 발사고도가 낮고 거리가 짧아서 미사일이 아니라고 해도, 국내외 미사일 전문가들은 위성사진을 보고 미사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단거리 미사일은 미사일이 아닌가? 발사고도가 낮고 사거리가 짧다고 미사일이 아니면, 꽃게탕에 꽃이 없으면 꽃게탕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봉영식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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