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손병호] 부시 때문에 더 아픈 10주기

국민일보

[데스크시각-손병호] 부시 때문에 더 아픈 10주기

입력 2019-05-23 04:01

지미 카터,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미국의 전직 대통령 4명 모두 국내에서, 또 국제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퇴임해서 더 보기 좋은 모습이다. 반면 우리에게는 변변한 전직 대통령 한 명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보석으로 풀려나 연일 법정을 들락거리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최장 수감기록을 세우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온갖 손가락질을 받으며 재판을 받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병 때문에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그 초라한 현실이 도드라진다. 부시 때문에 더 그렇다. 정작 한국선 누구 한 명 추도식에 갈 전직 대통령이 없는데, 태평양 건너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추도식을 찾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아버지 부시’ 장례식 때 4명의 미 전직 대통령들이 전부 모여 함께 추도하던 풍경 같지는 않더라도,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법한 행사인데 결국 그 자리를 부시가 메워줬다.

미국 전 대통령도 찾는 그 추도식에 제1야당의 대표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공식초청을 받았는데 가지 않기로 했다. 당일 강원도 민생 투어를 내세웠지만, 참석하기 불편해서일 것이다. 이미 황 대표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의자가 날아오는 등 망신을 당했다. 김정숙 여사의 ‘악수 패싱’ 논란도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이인영 원내대표가 황 대표에게 5·18 특별법을 처리하고, 한국당 소속 망언 의원들을 징계하고 오라고 잔뜩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황 대표가 오면 등을 돌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가기 전까지는 압박 차원에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어도, 이왕 갔으면 잘 있다 가게 해주는 게 예의다. 문재인 대통령도 황 대표에게 “잘 오셨습니다”라고 했다지 않는가. 집에 손님이 오면 앉을 곳을 마련해주는 게 우리 예의범절이다. 특히 그 자리가 불편하거나 오기를 꺼리던 사람이 어렵게 왔을수록 더 편하고 따뜻하게 맞이하는 게 도리다. 특히 상주(喪主)격 사람들은 더더욱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황 대표가 전두환도 아닌데 의자가 날아들게 한 건 행사를 주최한 정부 또는 여권의 잘못이다. 과거 제1야당 대표가 황 대표처럼 인파에 밀려 얼굴이 일그러지고, 옷이 잡아당겨지고, 의자가 날아들고 하는 폭력 사태를 당했으면 책임자 몇몇은 경질될 만한 사안이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 행사 뒤 떠나는 황 대표 뒤통수를 향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괴물이 되지 말자’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황 대표가 노 전 대통령 10주기 행사에 갈 마음이 생기겠는가. 게다가 10주기 행사 초청자인 유 이사장이 ‘등을 돌리라’고 한 마당에.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가 국민통합이다. 취임사에서부터 퇴임할 때까지 “국민통합은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노무현재단도 10주기를 ‘친노의 노무현’이 아닌 ‘모두의 노무현’으로 기념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반쪽짜리 행사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만약 문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지 않고, 노무현재단 주변에 있었다면 추도일 전에 황 대표를 찾아가 행사에 와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을 것 같다. 그런 걸 할 줄 모르면 괴물이나 마찬가지다.

요즘의 극단적인 배격의 정치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문 대통령이 남은 임기에 국민통합 정치에 좀 더 애써주길 바란다. 그래서 퇴임해서 더 보기 좋고 특히 모두에게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되길 고대해 본다.

손병호 정치부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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