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의 홍대’ 제기동에서 물었다 “졸혼 어때요”

국민일보

‘노인들의 홍대’ 제기동에서 물었다 “졸혼 어때요”

‘졸혼의 시대’ 노인들에게 직접 묻다

입력 2019-05-25 04:04 수정 2019-05-2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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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

“졸혼 좋지, 나이 먹어서 온종일 같이 있으면 보기 싫어.”

‘졸혼’을 설명하는 기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순자(63·가명) 할머니가 감탄했다. 3년 전 남편과 사별한 장 할머니는 “나이 먹어서 성치 않은 몸으로 같이 살기 힘들다. 사이가 좋다고 해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면 싫은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의 신조어로, 법적 혼인 관계는 유지하되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꾸리는 부부 관계를 말한다.

지난 15일 오전 10시 개장 시간에 맞춰 제기동역 인근의 콜라텍을 찾아온 노인들의 모습.

요즘 노인들 사이에서 대세는 ‘탑골공원’ 아닌 ‘제기동역’이다. 지난 15일 오전 9시쯤 찾아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은 60~90대 어르신들의 핫플레이스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잘 차려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북적였다. “앞으로 살 날이 길다”는 쿨한 멘트를 날린 장 할머니는 A 콜라텍으로 활기차게 걸어들어갔다.



“졸혼 어떠세요?” 노인들의 홍대 ‘제기동’에서 묻다

제기동의 아침은 홍대의 밤처럼 뜨거웠다. 제기동역 내부에 마련된 쉼터에서 60대부터 9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노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과일을 먹여주는 커플도 있었다. 노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즐기기 위해 제기동을 찾아온 노인들에게 졸혼에 대해 물었다. ‘100세 시대’ 노년들은 졸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60~90대 노인들이 지난 15일 오전 9시쯤 서울 제기동역 내부에 마련된 쉼터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인터뷰에 응한 노인 중 절반 이상이 졸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부정적인 반응보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노인들이 많았다. 졸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노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졸혼을 통해 ‘자유’와 ‘개인의 정체성’을 되찾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 이들이 많았다.

졸혼에 대해 알고 있다는 67세 박모 할아버지는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살았다. 돌이켜 보니 나를 잊고 살았다. 이제는 독립해서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주변에 이혼한 사람이 많다는 김모 할머니는 “서로가 안 맞으면 남자고, 여자고 살기 힘들다”며 “100살까지 산다고 봤을 때 결혼해서 같이 지낸 기간은 얼마 안되는 거다. 앞으로 살날이 많다. 따로 떨어져 지내는 거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콜라텍 입구에서 만난 77세 강모 할아버지도 “자식들 다 컸는데 졸혼을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결혼한 지 50년이 넘었다는 할아버지는 “따로 사는 늙은이들이 많다. 젊었을 때는 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자식들도 다 크고 살 만큼 살았으니 아내, 자식들이랑 따로 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졸혼에 반대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제기동역 근처 복지관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최모 할아버지는 “부부 간에 떨어져 살면 안된다.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 같이 한 침대에 눕고 한방에서 자야지. 떨어져 살면 남남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태껏 고생해서 자식들 다 키우고 이제는 죽을 날만 남았는데 따로 살면 되겠느냐”고 했다.

금전적 문제 등을 지적한 경우도 있었다. 결혼한 지 40년이 넘었다는 66세 강모 할아버지 역시 “법적으로 부부인데 사생활을 멋대로 하는 건 절대 반대”라며 “연금을 쪼개는 것도 싫다. 주위 시선도 좋지 않다”고 했다.

이모 할머니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실제로 졸혼해서 살 수 있을까”라며 “냉정하게 생각하면 서로 떨어지면 좋지. 하지만 내 남자가 다른 여자랑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 꼴 못 본다”고 말했다.



졸혼이란 새로운 선택지

최근 이외수 작가의 부인 전영자씨는 언론을 통해 “지금이라도 내 인생을 찾고 싶다”며 졸혼 소식을 알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배우 백일섭도 자신의 졸혼을 ‘커밍아웃’ 했다.

100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결혼 생활에 대한 노인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평균수명이 70~80세이던 시절에는 ‘지금껏 참고 살았는데 이 나이에 무슨 이혼이냐’며 남은 생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했다. 하지만 노년기가 길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는 “예전에는 70~75세가 되면 죽는 거로 생각했다. 60세에 은퇴한 후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냥 살자’라며 남은 인생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했다”며 “하지만 수명이 늘어나면서 요즘 사람들은 50세 때부터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특히 결혼 관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내놓은 ‘2018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이혼은 10만8700건이었다. 이중 결혼 20년 차 이상 부부의 이혼은 3만6300건으로 전년 대비 9.7% 늘었다. 30년 차 이상 부부의 이혼은 1만3600건으로 무려 17.3%에 급증했다. 10년 전보다 1.9배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노년 부부의 이혼은 사회적 평판, 유산 상속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혼 대신 각자의 삶을 사는 졸혼이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졸혼을 통해 법적·사회적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독립된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과 욕망을 허용받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회학자인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이혼을 하면 사회적인 스티그마(부정적 낙인)에서 오는 부담이 크다. 게다가 상속, 연금 등 경제적인 문제도 생긴다”며 “하지만 졸혼을 하면 배우자가 사망해도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혼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했다.



해혼, 휴혼, 이혼 그리고 졸혼… 다음은?

졸혼뿐만이 아니다. 길어진 노년기를 누구와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노년층에서는 해혼, 휴혼 등 다양한 결혼 관계가 모색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결혼 생활에 있어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김영옥 대표는 “졸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전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사는 사람과 더 잘 지내기 위해서 졸혼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며 “졸혼은 ‘이 사람하고 끝까지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서로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거다. 사람마다 늙는 방식이 다 다르다. 부부 관계는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글·사진=최민우 기자 cmwoo1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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