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이성규] 가계와 나라살림

국민일보

[세상만사-이성규] 가계와 나라살림

입력 2019-05-24 04:03

가장이지만 경제권은 아내에게 있다. 정확히 내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아내가 주는 용돈으로 산 지 10년이 넘었다. 경조사비든 후배들 밥 사는 일이든 아내에게 사후 보고 의무가 있다. 단 하나 내 마음대로 지르는 소비가 있다. 7살 딸아이의 장난감이다. 방 하나가 꽉 차 작은방에도 장난감 가게를 차릴 만큼 장난감 부자다. 하지만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아이 손을 잡고 마트 장난감 진열대에 갈 때 짜릿한 희열을 놓지 못하고 있다. 장난감 지출만큼은 재량권이 있었다. 최근 아내의 가계부를 우연히 보게 됐다. 새집을 분양받아 중도금을 내느라 가계 사정이 좋지 못했다. 향후 몇 년간 내야 할 대출이자는 의무적 지출이다. 그걸 알고 나니 지난 주말 아이가 5만원이 넘는 큰 장난감을 골라 건네줄 때 손이 조금 떨렸다.

가계나 나라살림이나 이치는 똑같다. 버는 것 이상 쓰면 빚이 생기고, 그 빚은 대신 갚아줄 사람이 없다. 월급이 오르지 않는데 소비가 늘어나면 적자 가계가 되는 것처럼 세금은 그대로인데 재정지출을 늘리면 나랏빚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특히 재량으로 줄일 수 없는 의무지출 예산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재정에 적신호다. 나라살림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재정 확대 정책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양극화 해소와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재정지출을 확대하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은 그것만으로 나쁘다고 볼 수 없다. 실제 단기적으로 재정 확대 정책은 효과를 보고 있다. 올 1분기 가계동향에서 저소득과 고소득가구 간 소득 격차가 조금이나마 개선된 것은 노인일자리 확대 등 재정 확대 효과가 컸다.

그러나 정부는 확장적 재정 운용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세수 증대에 대해서는 말을 꺼린다. 문재인정부는 대선 공약집에서 복지 확대를 위해 5년간 178조원이 소요되며, 이를 위한 재원 조달방안도 함께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고액 상속증여세 부담 인상, 법인세 인상 등 ‘부자 증세’가 주 내용이다. 이를 위해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에 재정개혁특별위원회를 두고 조세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재정개혁특위는 지난해 말 흐지부지 사라졌다. 부자 증세는 물론 근로자의 절반이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왜곡된 세수체계 개선방안도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최근 국세청 관계자들을 만나면 세수 걱정뿐이다. 지난해를 정점으로 3년간 계속된 세수 호황이 꺾이고 있기 때문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마저 “앞으로 초과세수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새로 돈이 솟아날 구멍은 없는데 정부는 확장적 재정 정책의 효과만 강조하고 있다. 매달 갚아야 할 대출이자는 생각 못하고 아이 장난감 사줄 생각에 여념이 없는 철없는 아빠와 닮은꼴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내년 40%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된다. 2009년 31.2%였던 점을 감안하면 10년 새 10% 포인트 오르는 가파른 곡선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40%라는 숫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년 예산부터는 저소득 실업자의 취업과 생계를 지원하는 실업부조제도가 도입되고 기초연금과 근로자녀장려금 확대 등이 반영된다. 이런 복지 확대는 한 번 늘어나면 다시 줄일 수 없는 경직적이고 의무적인 지출이다. 지금이라도 재정건전성의 급격한 악화를 막기 위해 증세 등 조세개혁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표를 갉아먹는 증세에 부담을 가진다면 현 정권은 성공할지 몰라도 미래세대는 암울해질 수 있다. 확장적 재정운용과 함께 이를 뒷받침해줄 조세개혁은 균형감 있게 이뤄져야 한다. 예산은 2개로 나뉜다. 우리가 잘 아는 정부가 돈을 쓰는 예산을 세출예산이라 하고 이를 위해 세금을 어느 정도 걷겠다고 정하는 것을 세입예산이라고 한다. 예산 확충은 세출과 세입 모두에서 이뤄져야 한다. 조세개혁에 따른 여론 악화와 지지율 하락이 겁난다면 확장적 재정 폭도 그에 따라 줄이는 게 맞다.

이성규 경제부 차장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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