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수 칼럼] 정년연장 지금은 아니다

국민일보

[신종수 칼럼] 정년연장 지금은 아니다

입력 2019-05-29 04:01

기업 자율에 맡기고 법 제정은 나중에… 청년고용에 지장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입
임금체계 개선, 고용유연화 전제 돼야… 은퇴자들 눈높이 낮춰 인생 이모작 나섰으면


집사람은 나더러 정년퇴직을 하면 아파트 경비원을 하라고 한다. 키는 커 가지고 맨날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지 말고 뭐라도 하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경비원이냐며 반발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아파트처럼 주차장이 좁아 이중으로 일렬주차를 해야 하는 곳에서는 차를 밀어주기도 하고, 노인들의 짐을 들어주거나 부축해 주는 일 정도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갖고 놀던 공이 높은 곳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내려주는 것쯤은 남들보다 훨씬 쉬울 것이고.

몸만 쓰는 게 아니다. 게시판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 안내문이라도 붙일 때는 아이들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맞춤법이나 문장이 틀리지 않게 쓸 자신도 있다.

택시를 탔는데 해병대 사령관 출신 운전 기사를 만난 적이 있다. 혹시 거짓말인가 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사실이었다. 택시 운전을 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는 해병대 정신으로 하는지 전혀 힘든 표정이 아니었다. 장군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택시기사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딸과 사위도 나란히 육사를 나와 영관급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등 이런 저런 얘기도 많이 했다. 그는 친절하고 깎듯하게 목적지까지 태워다 준 뒤 내리는 나에게 거수경례까지 했다.

고령사회다. 노인 빈곤과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중장년층을 좀 더 일자리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숙제다. 요즘 만 60세인 정년을 연장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얼마전 대법원이 육체노동 가동연한을 60세에서 65세로 올려 논의에 물꼬를 텄다. 정년연장은 중장년층이 가장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버스 대란 직전에 전국 주요 도시에서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된 것도 버스기사 정년을 63세로 연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덜컥 법으로 정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청년실업 문제와 상충된다. 정년연장이 꼭 청년실업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년이 연장되면 청년고용이 제약을 받는 것은 상식이다. 더구나 지금은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둘째, 나이가 많을수록 임금을 많이 받는 연공서열식 임금체계가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년연장이 되면 기업들의 부담이 크다. 임금피크제가 시행되고 있을 뿐 고용유연화는 여전히 다른 나라 얘기다. 셋째, 정년을 연장하더라도 정부가 나서 법부터 제정하기보다 기업들이 각각의 상황에 맞게 필요에 의해 자율적으로 정년을 연장하는 것이 우선이다. 인력난이 심한 일본도 법정 정년은 60세다. 다만 80%의 기업들이 정년연장, 정년폐지, 계약사원 재고용 중에서 적합한 방식을 택해 만 65세까지 고용하고 있다. 정년이 연장된 버스기사의 경우 젊은이들이 좀처럼 하지 않으려 하는데다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직종이다. 정년연장을 해도 청년실업을 악화시키지 않는다. 준공영제가 실시되는 지역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버스회사의 부담도 크지 않다.

정년연장이 청년고용에 지장을 주는 업종은 은퇴 후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있다. 좋은 일자리만 고집해서는 답이 없다. 청년들과 경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중장년층과 청년들의 일자리는 업종별로 다를 수 있고, 한 직장 내에서도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과 나이 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기존 회사에서 계속 일할 경우 일단 은퇴한 후 계약직이나 촉탁 등으로 재고용 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청년들과 일자리 경쟁을 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도 많다. 보수는 적지만 봉사를 하면서 보람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중장년층에게 일자리는 절실히 필요하다. 중장년층 10명 중 4명은 노부모와 함께 성인기 미혼자녀까지 부양하는 이중부양 부담을 지고 있다. 가진 것이라곤 달랑 집 한 채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민연금 수령은 만 62~65세부터 가능해 한동안 소득 없이 지낼 수밖에 없다. 정년퇴직 후 일자리가 없으면 곧바로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상대적 빈곤율은 45.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 1위다. 이들을 부양해야 할 미래세대의 부담이 크다. 하지만 자녀의 경제력도 좋지 않아 부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결국 셀프부양을 해야 하는데 노후준비도 안 돼 있다.

중장년층이 은퇴 후 이모작에 성공하면 우리나라 총 잠재생산성이 20%가량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결과 청년 고용도 증가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우리나라 중장년층의 대부분은 베이비붐 세대다. 경제적 고도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로 가장 오래,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장기집권 후 정권을 또 연장하려 하듯이 정년연장에 눈독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 눈높이를 낮춰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길을 찾으면 좋을 것이다.

신종수 논설위원 jshi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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