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요”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요”

화가 박수근 아내 김복순 전도사와 양구 박수근미술관

입력 2019-05-3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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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전시된 현대작가 조덕현의 회화설치 작품. 서울 창신동 집 마루에서 박수근이 아내 김복순과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을 모티브 삼았다.

서울 동평화시장 북쪽, 즉 창신동문구완구시장 즈음에 고딕 양식의 멋진 석조교회가 위풍당당한데 예장통합 측 동신교회다. 주일이면 5부 예배까지 이어지는 규모 있는 회당이다. 1956년 6·25전쟁 피난민 등이 중심되어 설립됐다.

서울 동신교회

그 피난민 가운데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한국의 대표 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 화백 부부가 있었다. 박완서 소설 ‘나목’에는 전쟁 직후 미8군 PX(현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먹고 살기 위해 미군 초상화를 그려줘야 했던 박수근의 삶이 드러나 있다. 박완서는 당시 이 PX에서 화가들의 영어통역을 하며 가난의 시대를 이겨냈다. ‘나목’은 그의 등단작이다.


‘나목’에서 남자 주인공 옥희도의 부인이 박수근의 부인 김복순(1922~1979) 전도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여주인공 이경은 성서 속의 지혜롭고 품위 있는 여인 브리스길라와 같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에 스스로 화가 나곤 한다. 박수근 김복순 부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신앙인의 자세로 살았다. 김복순은 남편이 죽고 서울 중곡동교회 사역자가 됐으나 전도 중에 별세했다. 서울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동생 한승직 목사가 시무하던 때였다.

김복순은 강원도 금성군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춘천여고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양구보통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환쟁이 박수근’과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김복순은 늘 천국의 모델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기도했다.

박수근미술관의 제2전시실 박수근파빌리온

가난한 환쟁이·부잣집 신여성의 결혼

지난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미술관. 국민화가 박수근을 기리는 기념관, 전시관, 창작스튜디오 등이 캠퍼스를 연상케 한다. 수도권에 있었으면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을 아름다운 미술관이었다.

박수근기념전시관 뒤편 숲길을 따라 오르자 박수근 김복순 부부의 묘가 평화롭게 자리했다. 원래 박수근 묘는 동신교회 교회묘지인 경기도 포천 동산에 있었다. 6·25전쟁 통에 피난민이 됐던 부부는 북강원도 금성감리교회를 떠나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자리 잡았고 이 교회에 출석했었다.

박수근이 아내 김복순에게 쓴 사랑 고백 노트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요’라는 편지로 사랑을 구했던 박수근. 그는 김복순에게 ‘그림과 가족, 기도밖에 모르던 순박한 사람’이었고 김복순은 그 성품에 반해 결혼했다.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10대 후반 고향 양구에서 떠밀려 금성에 살았다. 그때 빨래터에서 김복순을 보았다. 그의 유작 ‘빨래터’는 국내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을 기록했다.

가난한 화가는 마루를 작업실 삼았다.

박수근은 늘 가난했다. 김복순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맞춰 살았다. 사후에야 유작전이 열리는 등 새롭게 평가됐고 국민화가가 됐으나 생전 집 한 칸 마련도 쉽지 않았다.

미술관 내 박수근 김복순 묘. 십자가가 선명하다.

지금 양구 부부의 묘지엔 ‘아기 업은 여인 묘화비’와 ‘전도사 김복순’ 묘비가 나란히 서 있다. 묘화비는 1978년 동신교회 포천 동산에 세웠던 것을 미술관 건립(2004년)과 함께 이전했다.

양구는 접경 지역이다. 금성은 양구와 지척인데도 휴전선이 가로막혀 갈 수 없다. ‘서민 화가’로도 불리는 박수근에 대해 미술평론가들은 형식적 특징, 즉 유화의 두터운 마티에르 추구와 같은 경향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미술평론가들이 부부의 신앙적 배경과 믿음에 대한 이해를 평론에 반영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함과 진실함에 대한 예술적 견해. 이는 박수근이 열두 살 무렵 밀레의 ‘만종’을 보고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른 데서 시작됐다. 그는 “하나님 저도 이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꿈을 훗날 김복순에게 고백했다. 온순한 주일학교 학생 박수근은 보통학교에서 도화(圖畵) 과목이 빼어났다.

두 사람은 금성감리교회 교우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잘 알진 못했다. 박수근의 아버지는 아내를 병으로 잃고 금성으로 와 시계포를 차려 생계를 이어갔다. 박수근은 일본 미술 유학을 꿈꿨으나 가세가 기울어 포기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뒤 환쟁이로 살았다. 그의 금성집 이웃이 김복순 집이었다. 김복순이 “하루 세끼 조 죽을 끓여 먹어도 좋으니 예수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집으로 시집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던 때였다.

1940년 강원도 금성감리교회 결혼예배 사진

남편 피난 시키고 대탈출에 성공

김복순 아버지는 춘천의 병원장 집과 딸의 혼사를 서둘렀다. 그러자 김복순을 마음에 두고 있던 박수근은 그 소식을 듣고 드러누웠다. 김복순 또한 신앙 좋은 청년 박수근에게 마음이 끌렸다. 두 사람은 금성감리교회에서 한사연 목사 주례로 예식을 치렀고 내금강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김복순은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고 계모와 엄한 아버지 밑에 자라 늘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남편이라기보다 어머니 같고 오빠와도 같은 분으로 존경하는 염을 갖게 하는 분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만큼 부부는 신앙 안에서 행복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들은 학살 대상이 됐다. 삼팔선 이북 금성군 민주당 당수였던 한사연 목사를 도왔으니 목숨 부지가 어려웠다. 김복순은 남편을 피난시켰고 자신은 내무서에 연행됐다. “당신 남편이 국군 앞잡이로 포스터를 그렸다”면서 온갖 고문을 했다. 김복순은 두어 차례 수모를 견뎠다. 두 살짜리 아기를 이때 잃었다. 한사연 목사는 두 아들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박수근이 월남한 후 김복순은 시동생에게 “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소. 남편 찾다가 죽으면 죽고 다행히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 떠납시다”라며 여덟 살, 네 살 두 자녀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양양 남대천을 건너 미군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군이 김복순에게 중공군 주둔 지역을 심문했고 그녀가 지도를 가리키며 알려주자 되레 간첩 아니냐며 의심했다.

김복순은 “여학교 다닐 때 지도 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나는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했다. 미군은 그를 친절히 안내했고 춘천피난민임시대피소, 안양대피소 등으로 후송됐다. 그때 남편은 창신동 자신의 남동생 집에서 매일 울며 아내와 가족의 생사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안양대피소에서 천신만고 끝에 한강철교를 건넌 김복순은 창신동에서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성남 아버지(남편)가 그 자리에 서고, 나도 그이를 보니 자리에 선 채로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박수근을 선(線)으로 표현한 위세복 작품

김복순 일기를 보면 처음과 끝이 기도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삼계탕을 끓여주겠다고 하고선 정작 닭 한 마리조차 못 잡는 남편, 전쟁 후 가난 속에서도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다. 그 애잔한 삶의 풍경을 박수근은 작품으로 표현했다. 밀레의 ‘만종’ 속 부부의 모습은 그들 자신이었다.

양구·양양=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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