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너의 의미

국민일보

[시온의 소리] 너의 의미

입력 2019-05-3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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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을 지내다 보니 유난히 선물 살 일이 많았다. 하여 평소에는 발길이 뜸한 백화점을 들렀던 어느 날의 일이다. 깔끔하게 꾸며진 화장실, 옷매무새를 가다듬거나 여유롭게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흐느낌이 들려왔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화장실 안이었다. 똑똑똑, 문이라도 두드리고 괜찮은가 묻고 싶었지만 괜히 무례한 간섭이 될까 봐 관심을 거두었다. 그런데 곧이어 그 화장실 안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나더니 울먹이는 소리로 짧게 ‘네, 네’ 대답을 하고 문이 열렸다. 이내 내 옆으로 와서 수도꼭지를 트는데 거울 너머로 얼핏 얼굴이 보였다. 스물은 넘었을까, 앳된 얼굴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세면대에 서자마자 물을 제일 세게 틀었는데, 흐르는 것이 수돗물만은 아닌 것이 너무나 확연했다. 요즘엔 낯선 사람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세상이라 괜한 오지랖이지 싶어 돌아서다 말고, 나도 모르게 그 아가씨의 오른쪽 어깨를 토닥토닥하고 말았다.

괜한 짓이었나. 덕분에 눈물만 뚝뚝 흐르던 그 아가씨의 입에서 통곡이 흘러나왔다.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울음에 나도 모르게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어정쩡 안아버렸다. 그랬더니 언제 봤다고 아이처럼 내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거다. 이것 참. 난감해하는데, 옆에서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나보다 연배가 더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상황을 목격하셨던 듯, 아가씨에게 말을 건넸다. “너무 마음에 담지 말아요. 사람 같은 소리를 해야 새겨듣지. 괜찮아요. 괜찮아. 지나가는 짐승이 짖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아가씨가 잘못 한 것 하나도 없어요. 아니, 잘못을 했어도 그래. 어디서 남의 귀한 딸에게 욕지거리야. 천박해 정말!” 구구절절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대략 감이 왔다. 가끔 신문기사로도 접하는 바로 그 ‘백화점 갑질’을 당했나 보다.

졸지에 화장실에서 생성된 여성 연대(하긴 갑질을 한 사람도 여자이긴 했다)를 대략 마무리하고 길을 나서려니 생각이 복잡했다. 도대체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례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 자기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을까? 사람이 가진 제도적 감정을 연구하는 조직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고위직 공무원, 사장, 교수, 목사 등 자신의 답으로 공동체 전체가 움직이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례함을 모르는 경우가 다른 직업군에 비해 현저히 빈번하다고 한다. ‘나의 의미’만 전달했을 뿐 ‘너의 의미’를 살피고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여 상대방에게 인격 모독에 해당하는 폭언을 쏟아내고 나서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단다. 수평적 피드백과 검증이 없는 자리에 오래 있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공동성향이란다. 그 날의 무례한 갑질 수행자는 그런 직업군이었을까? 아니면 돈 많은 고객이라 무소불위 서비스업 제공자 위에 군림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그러니까 서로가 형제자매인 사이에서는 결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얼간이, 멍청이라는 의미)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직계 혈육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 아닌가. 더구나 예수께서는 전제를 달지 않으셨다. 그런 말을 들어도 마땅한 형제자매는 없다. 자신의 사회경제적 입지를 높게 여기며 ‘나의 의미’를 거스르는 ‘너’에게 마음껏 분노를 표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살인에 준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건 ‘인격 살인’이니까. 그러니 되돌아볼 일이다. 행여 ‘나’는 ‘너’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고귀한 인격을 죽이는 언행을 하지는 않았는지.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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