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한국의 ‘캐시’를 찾습니다

국민일보

[길 위에서] 한국의 ‘캐시’를 찾습니다

입력 2019-06-0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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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칙필레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그레그 톰슨과 만나그룹 창업자인 폴 세이버가 방한해 그들의 회사와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 행사가 있었다. 목회자들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설교 100편을 듣는 것보다 가슴을 뛰게 했다. 특히 칙필레 창업자 트루엣 캐시(1921~2014)의 이야기는 잊을 수가 없다.

캐시는 별세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그의 경영 비밀은 잠언 22장 1절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구절은 이렇다.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새번역) 그가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가족, 일의 순서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이 같은 신념은 주일에는 철저하게 쉬면서도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배경이 됐다.

캐시 회장 일화를 들으면서 한국에도 제2, 제3의 캐시가 존재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기독교 신앙을 첫 번째 순위에 두면서 자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신자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을 거란 기대였다. 다만 이들이 꼭 캐시 회장처럼 CEO나 사장, 대표 등 지위가 높은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 회사원, 기독교인 노동자, 집사님 버스기사, 장로님 공무원, 기독교인 청소노동자, 그리고 교회 청년부를 다니는 편의점 알바 등 모든 직업군에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안에는 아직도 ‘고지론’에 대한 신화가 존재하는 것 같다. 신앙 좋은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그 영향력이 커지기에 될 수 있는 한 ‘머리’가 되자는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일과 신앙’ 분야는 대부분 크리스천 경영자들이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주목을 받는다. 한국기독실업인회(CBMC)나 직장선교회, 기업 신우회 등이 대표적이다.

왜 캐시 회장 같은 삶을 사는 크리스천 공장노동자, 기독인 농부, 크리스천 택시기사, 기독교인 비정규직 사원, 기독교인 편의점 주인의 이야기는 좀처럼 듣기 어려울까. 한국교회는 이미 고지론을 충분히 경험했다. 장로 대통령도 있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소개되는 국무총리나 장관, 국회의원, 법조인, 기업인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바라기는 다양한 현장에서 일하는 ‘캐시’를 만나고 싶다. 지위고하와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가 버스기사라면 정속으로 운행하고 승객을 위해 급출발이나 급제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장이라면 사원들에게 갑질을 할 수는 없다. 공무원이라면 목회자의 심정으로 민원인을 섬길 것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면 다리를 꼬고 앉아 스마트폰을 보다가 손님이 오면 성의 없이 바코드를 찍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착화된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구조적 결함을 용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의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에도 나서야 한다. 새번역 성경 잠언 13장 23절은 이 문제를 잘 지적한다. “가난한 사람이 경작한 밭에서는 많은 소출이 날 수도 있으나, 불의가 판을 치면 그에게 돌아갈 몫이 없다.” 이 구절은 개역개정 성경과는 뉘앙스가 현저히 다르다. 다수 영어성경은 새번역 구절과 흡사하다.

어느 저녁 퇴근길에 동네를 오가는 환경미화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항상 저녁에 혼자 일했다. 접이식 작은 손수레 하나만 끌고 다녔다. 그의 일은 단순했다. 각 가정에서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길가로 이동시켜 여러 개를 한꺼번에 쌓아두는 일이었다. 이렇게 쓰레기봉투를 모아놓으면 이튿날 새벽에 청소차량이 와서 수거했다. 그는 사전 청소작업을 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어김이 없었다. 캔이나 유리병, 페트병 등 재활용 쓰레기를 담는 그물망이 제자리에 있는지도 점검했다.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작동하는 것은 이런 분들이 각자 자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눈에 잘 띄지 않고 주목을 받지는 못해도 너무나 소중하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일을 ‘주께 하듯’ 하려는 신자일 수 있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일을 영광스럽게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명인이나 지위가 높은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누룩처럼 살아갈 때 더욱 확장될 것이다. 맹렬하게.

신상목 종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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