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벽과 양양교회 성도가 일으킨 만세운동, 들불처럼 번져

국민일보

조화벽과 양양교회 성도가 일으킨 만세운동, 들불처럼 번져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9) 양양교회와 조화벽

입력 2019-06-1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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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풍 양양교회 원로장로가 지난 7일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교회 담임목사실에서 남문로를 가리키며 100년 전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저기 보이는 길이 양양읍을 가로지르는 도로입니다. 100년 전에도 있었죠. 1919년 4월 4일, 저 길로 태극기를 든 군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달 9일까지 이어진 양양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린 순간이었죠. 양양교회 교인들은 군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꿈을 심어줬습니다. 그런 면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은 이곳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재풍(83) 양양교회 원로장로가 지난 7일 강원도 양양군의 교회 담임목사실에서 300m쯤 떨어져 있는 남문로를 내려다보며 100년 전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을 설명했다. 교회가 터를 잡은 언덕은 지금도 양양읍의 중심이다.

향토사학자인 이 장로는 “일경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가까이 만세운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신앙이었다”면서 “지금도 교회가 ‘구국의 제단’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독립운동의 용광로가 됐던 교회는 1901년 10월 5일 로버트 하디 선교사가 창립했다. 원산 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하디 선교사는 교회로 모여든 청년들에게 복음과 민족의식을 이식했다. 양양 만세운동은 하디 선교사에게 교육받은 한 여성이 이끌었다.

조화벽 선생

만세운동의 불씨를 붙인 사람은 조화벽(1895~1975) 선생이었다.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던 조 선생은 3·1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자 3월 말 고향인 양양으로 돌아온다. 개성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 뒤 배로 갈아타서 속초 대포항까지 왔다. 대포항에서 양양까지는 걸어서 이동했다.

긴 여정을 이끈 힘은 양양 만세운동을 향한 꿈이었다. 개성 만세시위를 이끌었던 호수돈여학교 비밀결사 대원이던 그에게 휴교령은 기회였다. 일제는 만세운동의 확산을 막겠다고 전국적 휴교령을 내렸지만, 이는 오히려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조 선생은 개성에서 낭독했던 독립선언서 한 부를 버선 안에 감춰서 양양에 도착했다.

고향에 온 그는 교회 청년들부터 만났다. 만세운동 취지를 설명하고 역할 분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면사무소 직원이던 김필선씨에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그는 면사무소의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찍었다.

태극기는 교회에서 50m쯤 떨어진 상여 보관소에서 그리기로 했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상여 보관소는 비밀 회합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태극기는 조 선생을 비롯해 김재구 김계호 등 교인들이 직접 그렸다.

교회 청년들에 의해 시작된 만세 소리는 꺼질 줄 몰랐다. 군민들의 기세에 일경이 물러선 일도 있었다. 이 장로는 “6일 군민들이 경찰과 군대를 밀어내고 양양읍 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서장이 나와 ‘우린 물러날 테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라며 “군민들은 만세를 외친 뒤 저녁에 자진 해산했다”고 밝혔다.

교인들이 아닌 군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유학자 박원병과 지역 유지였던 임병익 오정현이 힘을 합쳤다. 이장들은 흩어져 있는 마을의 주민들을 하나로 묶었다.

엿새 동안 이어진 양양 만세운동은 현북면 기사문리에 있는 만세고개에서 막을 내렸다.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000여명의 군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기사문리 주재소로 향했다. 주재소는 지금의 경찰 지구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첩보를 입수한 일경과 헌병은 기사문리 언덕에 병력을 배치했다. 군경은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이날만 9명이 목숨을 잃고 20여명이 다쳤다. 군민들은 자진 해산의 길을 택했다.

양양군에 따르면 4월 4일부터 9일까지 연인원 1만50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군 인구가 3만6000여명 임을 감안할 때 41% 이상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셈이었다. 마지막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만세고개엔 ‘양양 3·1 만세운동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4400㎡의 면적에 세워진 유적비는 14.8m의 대형 탑과 두 개의 보조 탑으로 구성돼 있다. 2003년 9월 국가보훈처는 이곳을 현충 시설로 지정했다.

양양에 독립의 씨앗을 심은 조 선생은 이후 독립운동 명문가를 이뤘다. 그는 1925년 4월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했다. 이들 독립운동가의 혼인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는 계기가 됐다. 부부는 1932년 양양에 정명학원을 설립한 뒤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1990년 조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재풍 장로와 조선석 양양교회 담임목사(오른쪽)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구속된 교인들의 재판기록을 공개하는 모습.

인터뷰에 배석한 조선석 양양교회 담임목사는 양양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구속된 교인들의 재판기록을 공개했다. 조 목사는 “교인들의 재판기록은 최근 발굴된 사료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3·1운동 100주년이 된 올해를 기점으로 양양 만세운동에 관한 연구와 학술대회 등이 다양하게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양=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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