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희호 선생님을 추모하며

국민일보

[기고] 이희호 선생님을 추모하며

입력 2019-06-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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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을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최근 선생님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신 후로는 찾아뵙지 못해 늘 서운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지난 10일 밤 선생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비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을 YWCA에 보내주셔서 여성의 인권 향상과 평화를 위해 후배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일생 고락을 함께해 온 부군 고 김대중 대통령과 해후의 시간을 갖고 계실 줄 믿습니다.

선생님과 YWCA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천생연분이었습니다. 한국YWCA가 탄생한 1922년에 선생님도 탄생하셨지요. 올해 97주년을 맞이한 한국YWCA가 3년 후에 있을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살아계셔서 100주년을 선생님과 함께 축하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미국 램버스대학과 스카릿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던 선생님께서는 일생의 꿈을 묻는 말에 “아직도 후진 상태에 있는 여성을 지도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생각이 언제나 떠나지 않았던 선생님은 한국YWCA연합회에서 총무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승낙하셨습니다. 그때가 1959년,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니 우리나라 여성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받을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 YWCA 총무로 있으면서 제일 먼저 시작하신 일이 축첩반대 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을 위해 선생님을 비롯한 여성 지도자들은 팻말을 들고 거리행진까지 하셨습니다. 당시 공무원과 국회의원 중에 축첩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확인했기에 계몽 강연과 함께 ‘축첩자들에게 투표하지 말자’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데모도 하셨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혼인신고 운동을 펼치셨습니다. ‘혼인신고 하라’는 굵은 제목으로 포스터를 만들어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아내가 아니다’라는 경고문을 써넣으셨습니다. 이 포스터는 결혼한 여성들에게 경각심과 함께 혼인신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줬죠. 한국YWCA연합회 고문이셨던 박에스더 선생님의 도움으로 세계YWCA와 유엔여성지위위원회에도 보고를 해 한국YWCA의 사회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하셨습니다.

62년에는 YWCA가 중심이 돼 대한가정학회, 대한어머니회,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대한여학사협회, 여성문제연구회와 합동으로 친족상속법개정과 가사재판소 설치의 필요성을 주장한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그 결실로 63년 10월 가정법원이 설치됐고 이후 범여성 가족법 개정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63년에 총무직을 마치고 64~82년 자원봉사자로 한국YWCA연합회 실행위원이 되고 서기직을 맡아 임원 역할도 담당하셨습니다. 그 후 한국YWCA를 중심으로 저소득층 근로여성의 인권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빈곤과 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실무 책임을 맡았던 총무로서 실무활동가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아셨죠. 해마다 성탄절에는 금일봉을 보내 실무자들을 사랑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하신 공적이 인정돼 선생님은 2013년 한국YWCA연합회와 한국 씨티은행이 드리는 한국여성지도자 대상을 받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셨습니다. 선생님댁과 가까운 창천교회에 출석하면서 64년 장로로 추대되셨습니다. 매 주일 장년반을 지도하는 교사 역할을 하셨습니다. 당시 부군인 김대중 선생님께서 교도소에 구금되거나 자택에 감금당하실 때가 많았는데도 교사 역할은 이어졌습니다. 선생님은 그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받으며 꿋꿋이 견디셨습니다.

선생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면서 우리 후배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여성들과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본받아 지원과 사랑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신념을 갖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특별히 남북으로 분단된 이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한 선생님의 꿈을 이뤄드리는 일이 후배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YWCA 자원봉사자들과 실무활동가들을 지극히 사랑해주셨던 선생님께 마지막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이 땅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후배가 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YWCA를 이끌어주신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차경애 YWCA 복지사업단 이사장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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