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불안한데”… 독거노인 노출하는 ‘현황조사’

국민일보

“가뜩이나 불안한데”… 독거노인 노출하는 ‘현황조사’

“범죄 표적 찾기 쉽게 해주는 셈”

입력 2019-06-27 04:01

서울 성북구에 사는 할머니 오모(82)씨는 지난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독거노인’이 됐다. 지난 3월 오씨가 외출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대문에 ‘독거노인 현황조사를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메모(사진)가 붙어 있었다. 메모에는 자신의 실명도 함께 적혀 있었다. 지역 노인복지관에서 나온 독거노인 생활관리사가 현황조사차 방문했다가 오씨가 부재 중이어서 메모를 붙인 것이었다. 오씨는 “혼자 사는 것도 불안한데 이런 정보를 왜 외부에 공개하느냐”며 복지관에 항의했지만 “우린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란 답변만 받았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대문 고리까지 걸고 잔다”고 했다.

독거노인의 생활 실태나 건강 상태 등을 파악해 적절한 서비스를 지원하려는 독거노인 현황조사가 오히려 독거노인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황조사 때 집을 비우면 이런 식의 메모를 붙이고 가기 때문이다. 경기도 의정부의 한 노인복지관 홈페이지에도 “개인정보 유출인데다 나쁜 사람이 마음 먹고 그 집에 들어가면 어쩌려는 것이냐”는 민원 글이 올라왔다.

독거노인 현황조사는 혼자 사는 만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매년 2~3월 진행된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독거노인을 미리 발견해 고독사를 막는 게 목표다. 통계청에 따르면 혼자 사는 65세 이상 노인은 2010년 105만6000명에서 2018년 140만5000명, 2022년 171만4000명, 2025년 199만명, 2035년 300만3000명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취지는 좋지만 모든 노인이 조사에 흔쾌히 응하는 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고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걱정에서다. 정부는 “응답 내용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철저히 보호된다”고 홍보하지만 노인 상당수가 조사를 거부한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4월 발표한 ‘제2차 독거노인 종합지원대책’에서 독거노인 현황조사 대상을 현행 소득 하위 70%에서 2022년 전체 독거노인으로 넓히고 거부감을 완화하기 위해 현황조사 관련 홍보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독거노인이 늘면서 이들을 타깃으로 한 범죄도 잇따라 터지고 있다. 지난 1월 충북 청주에서 60대 남성이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밥 좀 달라며 들어갔다가 할머니를 폭행한 뒤 현금 25만원을 빼앗아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 8월 서울 종로구에선 40대 노숙인이 쪽방촌에 혼자 사는 90세 할머니를 성폭행했다가 붙잡혔다.

김영식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26일 “노인 혼자 산다고 대놓고 표시하는 건 범죄자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도 “범인에게 범죄 표적을 찾기 쉽게 해주는 셈”이라며 “좀 더 세심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독거노인 현황조사라고 밝히는 것과 이름까지 (메모에) 적는 건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며 “이름 일부분을 지우는 식으로 검토해볼 것”이라고 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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