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스무 걸음이 만든 새 역사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스무 걸음이 만든 새 역사

입력 2019-07-03 04:01

전 세계 이목 집중시킨 김정은·트럼프 판문점회담 일회성 이벤트에 그쳐선 안 돼
北 거부한 하노이회담의 일괄타결 방식 실현 가능성 낮아
다른 대안 찾는 게 현실적


판문점을 무대로 펼쳐진 ‘트럼프 쇼’가 흥행 대박을 쳤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당사자도 아닌 일본마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판문점 만남을 실시간 생중계로 보도했다. 판문점 발 뉴스가 모든 뉴스를 삼킨, 북·미 두 정상이 전 세계 톱 뉴스를 장식한 6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기꺼이 조연을 자처한 문재인 대통령은 두 정상의 만남을 더욱 빛나게 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흥행을 좌우하는 요소는 줄거리보다 볼거리에 있다. 권선징악 아니면 재난에 맞선 인간승리, 주제는 뻔한데 이를 어떻게 포장하고 각색하느냐에 따라 관객 반응은 달라진다. ‘세기적 만남’이었다고는 하나 두 정상이 내놓은 결과물은 별것 없다. 이달 중 북·미 실무협상을 재개한다는 것, 트럼프가 김정은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는 것 두 가지다. 그나마 김정은의 미국 방문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하다.

떠들썩했으나 먹을 건 별로 없는 잔치였다. 그럼에도 잔치의 기억은 꽤 오래 지속될 것 같다. 트럼프가 포장을 잘했다. 요소요소에 클라이맥스를 배치해 극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트럼프는 막판까지 호기심을 자극하며 여론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무엇보다 무대가 좋았다. 판문점이 갖는 장소의 상징성에 더해 김정은을 상대역으로 쓰는, 여태까지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니 흥행은 따논 당상이었다. 트럼프는 북한 지도자를 만난 첫 미국 대통령이란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전임 오바마 대통령이 못한 일을 난 해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여기에 자랑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 타이틀, 그는 “영광스럽다”고 했다. 트럼프와 앙숙인 CNN이 ‘트럼프, 스무 걸음으로 역사를 만들다(Trump makes history 20 steps)’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을 정도니 판문점회담을 성사시킨 트럼프의 자부심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북한의 판문점회담 띄우기도 트럼프 못지 않다. 북한은 노동신문 1~3면에 걸쳐 사진 35장과 함께 관련 사실을 대문짝 만하게 보도한 데 이어 16분짜리 판문점 상봉 기록영화를 방송했다. 노동신문은 판문점회담을 ‘역사적인 상봉’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정은도 트럼프만큼이나 판문점회담에 만족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회담을 통해 트럼프는 미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 쏠렸던 여론의 관심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고, 김정은 또한 체제의 안전과 함께 자신의 리더십을 북한 주민에게 선전하는 효과를 거뒀다. 김정은으로서는 ‘최고 존엄’의 체면 손상을 무릅쓰고 판문점으로 달려갈 만했다. 두 정상 모두 챙길 것은 확실히 챙긴 윈윈의 회담이었다.

쇼는 끝났다. 이제 그 비용을 정산하는 일이 남았다. 트럼프는 당장 내년 대선 경쟁자인 민주당으로부터 ‘판문점회담=리얼리티 쇼’라고 공격받고 있다. 트럼프로선 내년 재집권을 위해서도 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있어 속도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트럼프 외교의 또 한 축인 이란문제가 꼬여가고 있는 마당에 마냥 속도를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어서다. 김정은도 북한 경제 발전을 위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해제가 절실하다. 트럼프 트윗에 응한 자체가 어떻게든 타협점을 모색해보겠다는 시그널이다. 상황조건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 해결을 위한 긍정적 방향으로 조성되고 있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미국은 ‘유연한 접근’을 얘기하고 있다. 트럼프는 한·미 정상회담에 배석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판문점에 데리고 가는 대신 몽골에 보냈다. 또 김정은에게 미국측 카운터파트를 직접 고르라고까지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이다. 일괄타결 청구서를 내밀었던 하노이 방식으로는 협상 타결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미묘한 변화를 이끌어냈을 수 있다.

미국도 동시적·병행적 해법을 검토하는 단계에 접어든 게 아닐까. 문 대통령이 7개 세계 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영변 핵 폐기가 불가역적 비핵화의 입구’라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변 핵 폐기를 시작으로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순차적으로 핵을 제거해 나가는 방안이다. 물론 단계별 비핵화에 따른 미국의 상응조치가 있어야 한다. 북한이 거부한 하노이 방식이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행동 대 행동 로드맵을 만드는 게 현실적 대안이다. 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은 중재자로서, 촉진자로서 때론 당사자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야 한다.

판문점회담이 쇼로 끝나선 안 된다. 트럼프가 북한 지도자를 처음 만난, 북한 땅을 처음 밟은 대통령뿐 아니라 평양을 방문한 첫 미국 대통령으로도 기록되는 것을 보고 싶다. 김정은도 백악관을 찾은 첫 북한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세 사람이 다음엔 또 어떤 새 역사를 쓸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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