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승훈] 언더도그마 공격의 정치학

국민일보

[데스크시각-정승훈] 언더도그마 공격의 정치학

입력 2019-07-17 04:06

영국 내 단호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지지 여론의 배경에는 ‘로더럼(Rotherham) 사건’이 있다. 영국 북부 사우스요크셔주 소도시 로더럼에서 1997년부터 2013년까지 1400여명의 소녀들이 조직적으로 성적 착취를 받았다는 게 사건의 요지다. 지역에선 여러 차례 무슬림 이민자들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나 경찰과 주의회 정치인들은 심각성을 무시했다.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무슬림 커뮤니티와의 좋은 관계를 위해 경찰을 압박하고, 제보자들의 얘기를 묵살했다. 범죄가 10년 가까이 은폐돼 피해자가 늘어난 이유가 됐다. 2013년 알렉시스 제이 교수가 독립적인 조사를 진행했고 이듬해 8월 충격적인 결과가 발표됐다. 11~25세의 백인 소녀 1400명이 조직적 성범죄에 노출됐고, 그러한 범죄가 16년 동안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국인들은 사회적 약자로 여겼던 이민자들이 약자가 아닐 수 있음을, 그들을 약자로 인식하는 생각 자체가 잘못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피해자들은 토박이 백인 소녀들과 가족이었고 이민자들은 끔찍한 가해자였다. 게다가 영국 정부가 유럽연합(EU)에 속해 있어 성범죄자들을 국민의 법감정만큼 제재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 극우정당의 부추김까지 가세하면서 EU 탈퇴 여론이 일었고, 브렉시트 추진에 큰 동력이 됐다.

브렉시트 지지 여론의 배경에는 이처럼 ‘언더도그마(underdogma)’에 대한 비판, 나아가 이에 대한 공격적인 감정이 깔려 있다. 언더도그마는 힘의 차이를 근거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오류, 즉 맹목적으로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이다. 언더독(underdog)과 도그마(dogma)를 합친 단어다. 동정 과잉 등 언더독 효과의 문제점을 부각시켜 이를 언더도그마라는 단어로 정의한 것은 미국의 보수 유권자 결사체 ‘티파티’ 논객인 마이클 프렐이다. 프렐은 2011년 저서 ‘언더도그마’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가 비판하려던 것은 이슬람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분별한 옹호였다. 상대적 약자라는 이유로 이슬람권의 극단주의화나 인권탄압에 대해 침묵하거나 옹호하는 진보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공감대를 넓혔고 보수, 특히 극보수 진영의 논리로 차용됐다.

극보수 진영은 언더도그마 공격을 통해 무조건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건 옳지 않고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경계심을 자극했다. 이민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선거에 효과적으로 활용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언더도그마 공격의 선봉장이라고 할 만하다. 다음 주쯤 차기 영국 총리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 역시 부르카 복장의 이슬람 여성을 ‘우체통’이라고 조롱하는 등 언더도그마 공격을 주저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다분히 표를 의식한 것으로 보이는 정치인들의 이 같은 언행이 자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란을 제공하고 있으며 무역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과 관련 상대적 약자인 우방국까지 비난하고 공격하는 근저에는 자국 내 입지 확보를 위한 언더도그마 공격의 정치학이 깔려 있다. 어설프게 이를 모방하려는 이들도 나온다. 역사적으로도 피해자였고, 1965년부터 지난해까지 무역적자 추산액만 700조원이 넘는 등 교역 상대로서 ‘을’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을 향한 일본의 경제제재 조치는 ‘혐한’으로 대변되는 언더도그마 공격으로 자국민들을 자극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논리도 맥락도 없는 이런 공격을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외교에서도 무역에서도 언더도그마에 대한 공격을 활용하려는 국가와 정치인은 당분간 늘어날 것이다. 일본의 비이성적인 경제제재 조치에 대한 외교적 해결 노력이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승훈 국제부장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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