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32) “황장엽 선생님, 하용조 목사님 위해 기도해주세요”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2) “황장엽 선생님, 하용조 목사님 위해 기도해주세요”

탈북자동지회 방문해 인사 나눈 뒤 매주 북한 음식 만들어 전달…하 목사 병문안서 “예수 이름으로…”

입력 2019-07-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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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왼쪽 첫 번째)가 2009년 평양 숭실대 재건 모임에서 황장엽 전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세 번째), 방지일(네 번째) 박종순(다섯 번째) 목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02년 5월 제107주년 평양 정의여고 총동문회가 열렸다. 150여명이 몇몇 은사들을 모시고 여학생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동창회 회장은 후배인 곽선부 선생이었다. 곽 회장이 “우리 황장엽 선생님을 한번 찾아뵙는 게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나는 놀라서 국정원에 계신데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는 걱정 말라며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했다. 전 회장이자 정의학교 교사를 지낸 김명현 언니도 같이 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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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선생님은 매주 토요일 오전에 잠깐 탈북자동지회에 나오셔서 탈북자들을 만나 위로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케이크를 하나 사 들고 송파구에 있는 황 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은 작고 구석진 방이었다. 우리는 같은 고향 분이어서 인사드리러 왔다며 간단히 소개했다. 웃음을 보이진 않으셨지만 반기는 듯했다.

황 선생님은 평양상업학교를 다녔는데 어려서 양촌에서 지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이 양촌 가까이 있어서 자주 찾아가 놀던 곳이었다. 양촌과 가까운 곳에 숭의학교 숭실대 평양신학교가 있었고 서양 선교사 자녀들도 많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황 선생님이 가깝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그 어려운 망명길을 혼자 떠나왔지만 여기서도 부자유한 생활일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 동정이 가기도 했다. 경호원들이 항상 방 안과 밖에서 지키는 국정원에서 숙식하는 건 그야말로 감옥 아닌 감옥이었을 것이다. 토요일마다 이 사무실로 북한 음식이라도 갖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북한 만두와 북한식 콩비지, 장조림 등을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서 갖다 드렸다. 그 과정에서 이분이 주체사상을 버리고 우리 주님의 복음으로 거듭나면 북한의 어두운 세계를 빛나는 기독교 국가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사명감을 느꼈다. 예수를 핍박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 바울로 변했듯이 그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전도를 잘하지 못하지만,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연예인과 지성인들을 교회로 이끌며 전도에 탁월한 달란트를 보였다. 그래서 하 목사님에게 전화로 황 선생님 전도를 부탁하면서 토요일에 좀 찾아와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기쁘게 받아들여 책을 가져오기도 하고 선물로 모자도 사 와서 황 선생님과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전주대 이사장이었던 하 목사님은 황 선생님을 전주대 석좌교수로 대우하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사님 아들의 결혼식에서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황 선생님이 경청하시더니 후하게 칭찬을 하셨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선생님 이번 주일에 교회에 꼭 가서 하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십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황 선생님은 끝내 침묵하셨다.

하 목사님이 아산병원에 입원했을 때 일이다. 황 선생님이 병문안을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나는 입원실에서 두 분께 조금 무리일 것 같은 청원을 했다.

“오늘은 황 선생님이 하 목사님을 위해 먼저 기도하시고 저도 기도한 다음에 하 목사님이 황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싶어 긴장되는 마음으로 황 선생님을 바라보는데 그분이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시작해 제법 기도를 하시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그제야 황 선생님의 마음에 조금 싹을 틔운 듯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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