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한국형 반덴버그 결의’를 하라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한국형 반덴버그 결의’를 하라

입력 2019-07-29 04:01

준비 없고 친구도 없는데 못난 정치까지 가세해 한국을 외교안보 위기에 밀어넣어… 정파싸움은 국경선에서 멈춰야 해
대통령·여야는 붕당정치 그만하고 외교안보정책에서 국가핵심이익에 대한 초당적 합의이끌어 내고 대외전략 세워야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 민주당의 해리 트루먼 행정부는 외교안보정책 수립에 어려움을 겪는다. 냉전 시작으로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게 최우선 목표인데, 여론은 갈렸다. 소련에 대응할 국방예산 증가나 해외기지 증강에 반대가 많았고, 무엇보다 외교안보정책이 국내 정치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1948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민주당 정권의 서유럽에 대한 집단안보체제(나토) 창설과 재건계획(마셜 플랜)을 격렬히 반대했다. 전통적인 고립주의였다.

당시 공화당의 유력 대선후보 중 하나인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은 트루먼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대선 이후 실행 조건으로 민주당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의회는 외교안보정책에 초당적 협력을 약속하는 ‘반덴버그 결의’를 채택한다. 이 결의는 냉전에서 소련을 물리치는 원인(遠因)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미국 외교안보정책의 근본정신이 됐고 현대적 국가안보체제 구축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명언 “국내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외교사에 길이 남는다. 위기 앞에서 정파싸움은 다음 문제라는 걸 명확히 했다.

우리는 지금 위기 국면에 들어섰다. 그 이유는 첫째, ‘준비 없음’이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준비해왔던 전략의 실천이다. 조금 하다 말 전략이 아니다. 형태와 방법을 달리하며 다른 분야에서도 공격할 게다. 아베 정권의 기둥인 일본 우익은 한국을 지역패권 장악의 걸림돌로 본다. 여기에 어설프게 죽창가와 반일정신만 강조하며 전략적 무기를 제시하지 못하는 준비 없음이 위기의 첫째 이유다. 둘째, 주위에 적극 도와주는 친구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까지 건드리며 중재를 요청했지만 미국은 적극 관여할 의사가 없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한·일방문은 중재라기보다 더 이상의 악화 방지용이다. 우리만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고군분투하는 형국이다. 반면 러시아와 중국은 영공과 방공식별구역을 침범하고도 한국의 반발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북한의 대남 경고는 모욕이다. 개인관계와 마찬가지로 국제관계도 주변상황이 이렇게까지 갔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뭘 잘못했거나,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릴 능력조차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셋째, 그래서 위기의 진짜 본질은 우리 자신이다. 자학도 아니고 식민사관도 아니다.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일본의 국력은 우리보다 한수 위다. 그걸 인정하는 냉정함과 함께 이길 전략을 찾아야 하는데, 친일이냐 반일이냐가 국내 정치의 중심 의제가 됐다. 이게 위기의 핵심이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면 차분히 따져보고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언성만 높이다 “어디서 반말이야, 나이가 몇 살이야” 하고 따지는 한심한 행위와 똑같다. 굳이 대통령 비서가 나서 반일감정에 불지르지 않아도 국민 개개인은 충분히 분노하고 그 분노를 조절할 줄도 알고 적절한 행동에 옮길 줄도 안다. 그리고 자기 생활에서, 위치에서 어떤 대응을 할 수 있는지 생각도 한다. 부르르 떨면서 머리띠 맨다고 이기는 게 아니란 건 역사가 보여준다. 그런데 그 분노를 여야는 서로 정파적 이익을 위해 적당히 활용한다. 온 힘을 합해도 모자랄 판에 바깥 일을 내부 주도권용으로 바꿔 버렸다. 못난 국내 정치다. 국제정세와 주변상황을 그대로 읽지 못하고 편견과 정파 이익 관점으로 보는, 마치 동굴 속 인간이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진리라고 여기는 ‘동굴의 우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외교안보정책에 관한 한 당파를 초월해 협력하는 ‘한국형 반덴버그 결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국가핵심이익과 방향·전략에 대한 정치권 합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 반덴버그 결의가 서유럽 지원이라는 숭고한 명분도 있지만, 결국은 미국의 장기적 이익이라는 외교전략이 짙게 배어 있다. 전후 피폐한 유럽이 건강해져야 경제파트너로서, 안보파트너로서 미국의 핵심이익에 부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덴버그 결의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국익을 잃지 않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미국 정치의 결의다. 단지 야당이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해 준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일본의 경제보복과 이어 벌어진 대한민국 무시 행위는 우리의 생존 전략과 국익을 점검해보는 좋은 기회다. 정치권과 전문가들이 모여 국가핵심이익과 전략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외교안보정책에 관한 한 초당적 협의를 약속하는 한국형 반덴버그 결의를 하라. 끝나자마자 휴지조각 돼버리는 대통령과 5당 합의니, 여야 원내대표 합의 같은 건 소용없다. 나라가 망해간 19세기 말에 비해 엄청난 강국이 됐건만, 조선의 붕당정치와 같은 지금의 정파싸움이 구한말 열강, 특히 일본에 당했던 국치를 21세기에 또 부를까 두렵다.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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