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입력 2019-07-31 04:01

들불처럼 번진 불매운동, 일본에 당한 능욕과 치욕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민심의 집합체
우월한 경제력과 기술력으로 우리를 굴복시켜 한국을 다루기 쉬운 나라로 만들려는 아베의 속셈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겠다.”

한·일 국가대표 스포츠 대결이 펼쳐지면 으레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이 밝히는 각오다. 흡사 전장에 나서는 전사 같다. 너나없이 다른 나라엔 지더라도 결코 일본한테는 질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일 국가대표 축구 시합에서 우리 팀이 결승골을 넣었을 때 해설자는 “후지산이 무너졌다”고 흥분했고, 베이징올림픽 야구 한·일전에서 이승엽 선수가 8회 극적인 투런 홈런을 쳤을 땐 “공이 한반도를 넘어 대마도까지 날아갔다”고 열광했다.

한·일전을 하면 우리 선수들은 객관적 전력 이상의 경기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정신력 말고는 설명이 어렵다. 일본엔 질 수 없다는 비장함은 태극전사는 물론 한국인의 DNA를 갖고 있다면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다. 임진년의 왜란과 정유년의 재란, 그리고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자행했던 야만의 역사 탓이다.

일본은 경제대국이다. 중국에 그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일본의 GDP(국내총생산)는 오랫동안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유지했다. 이런 일본을 우리는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진짜 우스워서가 아니라 일본이 그 덩치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데 대한 일종의 무시다. 같은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면서 전쟁 피해국들에 취한 일본과 독일의 행위는 너무 다르다. 일본이 독일의 반의 반만 했어도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을 거다.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당시 관방장관) 담화, 일본의 식민지배를 공식 사죄한 95년의 무라야마(당시 총리) 담화를 계기로 한·일 간에 역사의 화해를 통한 공동의 발전이 모색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자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두 담화는 부정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베 정권에 의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

국제법상 국가는 동일성과 계속성을 갖는다. 국체나 정권이 바뀌어도 교체 전 이루어진 국가 간 합의나 조약은 유효하다. 박근혜정부 때 두 나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합의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를 일방적으로 뒤집은 문재인정부를 문제 삼는 게 터무니없는 억지는 아니다. 그러나 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우리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고 강제 징용자 보상이 끝났다는 아베의 주장은 말 그대로 아베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국가 간 청구권은 소멸됐어도 개인과 국가 간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게 우리 대법원의 판단이며 일본 내에도 같은 의견이 존재한다.

한·일 과거사 문제는 영원한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일본의 우경화 바람에 무라야마 담화를 이끈 사회당은 이미 20여년 전 해체됐고, 이를 계승한 사민당은 당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다. 문제는 자민당 정권이 바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고, 설사 정권이 바뀐다 해도 과거사 문제에 관한 야당의 노선이 자민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정경분리의 투 트랙 접근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우리의 선택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 문제를 과거사 문제 등 정치·외교 문제와 결부하면 두 나라의 건설적 미래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금기를 아베가 깼다. 그는 외교로 풀어야 할 문제를 경제적 수단으로 해결하려는 무리수를 뒀다.

일본은 반도체 핵심부품 수출규제에 이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등의 추가 규제에 나설 예정이다. 우리에 대한 경제 선전포고다. 정한론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베는 우리를 얕잡아본 게 분명하다. 그가 꿈꾸는 일본은 전전(戰前)의 일본이다. 그는 일본이 보복하면 대한민국도 대한제국처럼 맥없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한 듯싶다.

아베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우리의 무조건 항복이다. 한국이 강제 징용자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한·일 정상회담은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우월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우리를 굴복시켜 대한민국을 다루기 쉬운 나라로 만들려는 수작이다. 이 전쟁에서 지면 우리의 대일 경제 종속은 더욱 심화되고 영속화된다.

외교적 노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현 단계에서 협상을 마다하고 전쟁을 선택한 아베에게 외교를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본이 도발한 이상 응전은 불가피하다. 정부보다 먼저 시민이 나서고 있다. 들불처럼 번진 일본 불매운동은 일본에 당한 능욕과 치욕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민심의 집합체다. 우리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과소평가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북한발 위기만 있는 줄 알았다. 이번 아베의 도발로 위기는 언제, 어디서든 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소재·부품산업의 중요성도 새삼 깨달았다. 위기인 건 분명하나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위기다. 위기의 또 다른 의미는 기회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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