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성덕 칼럼] 한국의 주적을 자처한 아베

국민일보

[염성덕 칼럼] 한국의 주적을 자처한 아베

입력 2019-08-07 04:01

정치·외교 해법 도외시하고 경제침략 강행한 아베는 확실한 국제적 ‘경제사범’
文 대통령은 실현 가능성 낮은 ‘남북 평화경제’ 같은 발언 자제하고 처칠처럼 준비해야
GSOMIA 파기하면 동북아 외톨이로 전락할 수 있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난제들에 직면한다. 미국 참전 유도, 투쟁의식 고취, 국론통일, 덩케르크 철수작전. 처칠은 여러 나라가 독일 손아귀에 떨어지자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은 국내법을 이유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영국 주화파는 주전파 처칠의 낙마를 획책한다. 처칠은 국민과 하원의원에게 결사항전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처칠의 고뇌와 리더십을 다룬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에 나오는 대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독일에 굴복하면 버킹엄궁과 의사당에 나치 깃발이 휘날린다. 일부는 혜택을 누리겠지만 우리 해군은 무력화된다. 죽음을 각오하고 해안과 들판, 거리와 언덕에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설혹 점령당한다고 해도 연합군이 구할 것이다. 강력한 신세계가 구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처칠은 과감한 결단도 내린다. 프랑스 덩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을 구출하기 위한 다이나모작전을 승인한다. 프랑스 칼레 등에 있는 영국군에 옥쇄를 각오하더라도 독일군의 덩케르크 접근을 저지하라고 지시한다. 영국 전역에 민간 선박 징집령을 내린다. 동원된 선박들이 연합군 33만명 이상을 영국으로 철수시킨다. 기적 같은 일이다. 독일군을 반격할 때 이들은 엄청난 전력을 과시한다.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파고를 가늠할 수 없는 쓰나미가 덮치고 있다. 국내 경제 상황이 날로 악화하는 가운데 일본의 경제보복이 한국을 옥죄고 있다. 한·미·일이 엇박자를 내는 사이에 북·중·러는 밀월 관계를 회복했다. 북한은 연일 한국을 겁박하고, 중·러 군용기들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이나 독도 영공을 침범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

경제인들은 일본이 삼성전자를 주목했다고 말한다. 삼성전자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일본 업체 여러 곳을 합친 것보다 많은 현실을 엄중히 보고 칼을 갈았다는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가 불거지자 한국의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는 칼을 뽑았다고 분석한다. 일본은 백색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두 번째 방아쇠까지 당겼다. 정치·외교적 해법을 도외시하고 경제침략을 강행한 아베 신조 총리는 국제적인 ‘경제사범’이다. 경제 문제만 놓고 보면 아베와 일본 정부는 한국의 주적을 자처했다.

경제침략의 전방위 확산을 염두에 두고 극일(克日) 대책을 강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문재인정부는 초반에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국론만 분열시키는 패착을 두고 말았다. 이 정권의 준비 소홀과 국정 방치를 질타하는 목소리에 ‘친일·매국노·토착왜구’ 딱지를 붙이고 국민을 이간질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조국의 죽창가는 경제보복을 누그러뜨리거나 무효화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인의 반한 감정에 불을 붙여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하책이다. 양정철이 원장인 민주연구원은 “한·일 갈등이 총선에 긍정적”이란 취지의 보고서를 냈다. 둘 다 문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이들은 정파 이익만 대변하고 국익을 외면하는 정치 모리배가 분명하다. 한국의 국론분열을 노리는 아베를 도와준 꼴이 됐다.

세계 주요 언론이 일본에 불리한 방향으로 한·일 무역전쟁을 다루고 있다. 미국 전자업계 6개 단체는 경제보복을 우려하고 조속한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번 조치가 일본에 자충수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정권이 치밀하게 대처했다면 한국에 훨씬 유리한 방향으로 국제 여론이 조성됐을 것이다. 큰 피해가 예상되는 ICT 업체들과 연합전선을 폈으면 외국 정상들과 정치인들이 반(反) 아베 대열에 합류했을지 모른다.

정부는 세계 ICT 산업과 제조업의 생태계를 교란·붕괴시키는 아베의 폭거를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국내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포함한 장단기 대책을 빈틈없이 추진하는 동시에 아베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당장 실현될 가능성이 낮은 ‘남북 평화경제’ 같은 발언을 자제하고 처칠처럼 철저히 준비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반도를 겨냥한 북·중·러의 도발은 심각한 상황이다. 한·미동맹의 틈이 벌어지고, 한·미·일 관계가 틀어지는 시점에서 중·러의 공중연합훈련은 한국 안보에 대단한 악재다. 북한이 신종 미사일을 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모욕을 주는데도 군 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다. 일본을 향해 날 선 비판과 반응을 보인 것과는 딴판이다. 일각에서 제기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기 주장을 수용하면 곤란하다. 미국이 원치 않는 GSOMIA 파기 방안을 고수하면 한국만 동북아의 외톨이로 전락할 수 있다. 북·중·러의 관계 강화에 대비해 한·미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한·일, 한·미·일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내야 한다. 북·중·러·일에 치이고 미국에 외면당하는 동네북이 되면 안 된다.

논설위원 sdyu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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