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더위와 망상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더위와 망상

입력 2019-08-09 04:05

얼음이 가득한 잔을 들고 선풍기 앞에 앉으니 아이고 이제 좀 살겠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 모금 들이켜며, 고질적인 습관인 멍 때리며 엉뚱한 생각에 빠진다. 현실에 치여 복잡한 일들로 머리가 아프면 이 고질병이 더 도진다. 선풍기는 무슨, 얼음 한 조각도 왕이나 접하던 시대에 태어났다면. 전쟁통이라 시원한 물은커녕 당장 죽고 사는 위협에 쫓기고 있다면. 수십 ㎞를 조금이라도 덜 더러운 물을 긷기 위해 걸어야 하는 곳에 살고 있다면. 언제부터 이런 습관이 들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렸을 때 어디에선가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느낀다’ 등의 글을 본 걸까. 다 커서 정신과학을 전공하며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뇌에서는 노력에 따라 감정이 변할 수도,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자부할지언정 우리의 뇌는 선사시대 원시인에서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감정에 따라 먼저 행동하고, 여기에 합리적인 설명을 갖다 붙인다.

학생 시절 한 친구가 “덥다 덥다 하지 말고 아 추워 아이 시원해 해봐. 그럼 덜 힘들어”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더워 죽겠는데 뭔 소리냐고 퉁명스레 받아쳤던 기억이 난다. 뒤에야 알게 된 그의 상당히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이미 삶 속에서 생각이 감정을 지배하는 방식을 잘 알았던 것 같다. 굶주릴 때도, 가족이 흩어져도 ‘괜찮아. 나는, 우리는 괜찮아’라고 되뇌면서. 회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현 상황을 냉정히 판단하면서 강한 희망의 바람을 현재형으로 되뇌면 어느새 바람이 현실화하거나, 설령 현실은 바뀌지 않아도 감정에 휩쓸려 극적으로 터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기엔 감정이 너무 강하다고, 나는 그렇게 의지가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감정에 거리를 두는 연습이 힘들어 차라리 반대로 최악을 상상하며 지금에 감사하는 습관이 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감정은 거짓말을 많이 한다. 당신은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가.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한 번쯤은 냉정히 이런 생각에 잠시나마 풍덩 빠져보는 것도, 이 여름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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