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너머로 과거·현재가 마주보는 특별한 ‘작은 한양’

국민일보

돌담 너머로 과거·현재가 마주보는 특별한 ‘작은 한양’

‘호남의 중심·천년고도 목사 고을’ 전남 나주

입력 2019-08-14 18:07 수정 2019-08-14 18:18
전남 나주시는 ‘전라도의 중심’ ‘천년고도 목사 고을’로 일컬어진다. 인구 11만여 명의 ‘크지 않은’ 도시가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라도’는 전북 전주의 전(全)과 나주의 나(羅)가 합쳐진 명칭이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처음으로 전국 십이목(十二牧)을 두면서 나주목은 지방행정의 중심이자 전라도의 핵심이었다. ‘소경’(小京·작은 한양)으로 불리던 나주목은 1895년까지 1000년 가까이 유지됐다. 1896년 나주의 관찰부가 광주로 이전되면서 나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나주읍성의 동문인 동점문. 인근에 석당간이 있다.

광주에서 나주로 들어서면서 먼저 ‘동점문’을 찾아간다. 나주읍성의 동문이다. 읍성은 고려 시대에 쌓은 것으로 조선 세조 3년(1457년)에 성을 확장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동점문 외에도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 등 4개 성문이 복원돼 있다. 동점문 밖에는 독특한 형태의 기다란 돌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높이가 11m에 이른다. 보물 제49호로 ‘석장(石檣)’ ‘동문 밖 석당간’ 등으로 불린다. 선박과 비슷한 나주 지형에 돛대로 세웠다는 설도 있다.

나주곰탕 거리에서 드론으로 찍은 나주객사의 웅장한 모습. 외삼문인 망화루 뒤 중삼문과 금성관 사이 내삼문 자리가 텅 비어 있다. 금성관 좌우에 복원된 익헌이 당당하다.

이어 ‘금성관’ 이정표를 따라가면 성안으로 들어선다. 금성(錦城)은 나주의 옛 이름. 읍성 한가운데에 자리한 금성관의 정문인 외삼문 ‘망화루’를 지나면 박석이 깔린 너른 마당 위에 중삼문이 덩그러니 서있다. 그 뒤로 사라진 내삼문 자리가 휑하다. 하지만 정청인 금성관과 동서 익헌이 웅장한 위용을 내보인다. 모두 복원된 것들이지만 당시 나주목의 위상을 대변해준다.

금성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고려·조선시대에 나주목을 찾는 중앙 관리나 외국 사신이 묵던 곳이다. 오늘날의 영빈관이다. 조선 초기 목사 이유인이 건립한 것으로, 1603년에 크게 중수했다.

나무목사의 살림집 금학헌.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망화루 서쪽에 나주목 관아의 관문인 ‘정수루’가 서있다. 누각에 큰북이 달려 있다. 나주목사였던 학봉 김성일이 ‘원통한 일을 말하고 싶을 때 치라’고 했다 한다. 현재의 북은 2004년에 새로 단 것이다. 정수루 뒤쪽으로 나주의 동헌이다.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금학헌’만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군수 관사로 사용됐고 현재는 숙박체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금학헌 오른편에 팽나무가 내아의 담벼락을 가르며 우뚝하다. 수년 전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해서 행운의 나무로 여겨진다.

주변에 ‘진고샅’(긴 골목)이라 불렸던 널찍하고 비교적 곧은 골목길이 이어져 있다. 길을 지나면 ‘서성문’이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 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왔다 전해진다. 본래 이름은 영금문. 둘레가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나주읍성의 성벽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 손실됐거나 사라지고, 지금은 서성문을 기점으로 250m 정도만 남아 있다.

드론으로 찍은 나주향교. 가운데 큰 건물이 대성전이다.

인근 읍성 바깥쪽에 1407년(태종 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향교가 있다. 향교 앞 무성한 비석을 지나 문을 들어서면 유생들의 거처였던 동재와 서재의 규모가 엄청나다. 조선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크다. 바로 앞 대성전은 보물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아쉽게도 평소에는 들어갈 수 없다.

향교 돌담 너머에선 독특한 형태의 근대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건물이 목서원. 1896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를 수성한 향리수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모친을 위해 1939년 건립한 가옥이다. 구들장 난방을 하는 한옥을 기반으로 지붕과 창문구조는 일식, 왼쪽 사랑채는 삼각창과 육각창 등 서양식을 접목했다. 마당 가운데 100년 된 나무 금목서, 은목서가 있고 200년 된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연리목이 곁을 지키고 있다. 목서원 옆 언덕에 오르면 난파정이 있다. 정석진의 큰아들 정우찬이 1915년 건립했다. 최근 리모델링을 통해 한옥 숙소로도 사용된다. 나주향교를 비롯해 읍성을 내려다볼 수 있다.

복합문화공간 ‘마중 3917’ 내 목서원과 금목서.

이들 공간이 숙박, 공연, 전시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마중 3917’로 변모했다. 80년 된 쌀 창고를 보수한 목서원 카페에서는 창밖으로 나주향교 풍광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주할 수 있다. ‘마중 3917’은 ‘오랜 길목에서 마주친 특별한 시간, 별안간 나주’를 주제로 지난 3월 문화체육관광부 및 한국관광공사 주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권역별 관광콘텐츠 사업자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난파정 및 1917년 건축된 ‘시서헌’과 정원, 창고 등 옛 건축물과 풍경을 살린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발굴·진행하고 있다.

▒ 여행메모
나주곰탕·홍어요리… 대표 먹거리 국내 유일 내륙 등대 ‘홍산포등대’


수도권에서 전남 나주로 간다면 호남고속도로 북광산나들목에서 빠져 하남진곡산단로를 따라가다 운수나들목에서 무안광주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이어 서광산나들목에서 나와 연산교차로에서 빛가람장성로 및 건재로를 이용하면 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함평분기점에서 광주 쪽으로 가다 동함평나들목에서 나가 1번 국도를 타고 가도 된다. 대중교통은 서울 용산역에서 나주역까지 열차를 타거나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먹을거리로는 나주곰탕이 유명하다. 소뼈를 곤 뒤 양지·사태를 함께 고아내는 국물이 진하다. 금성관 앞에 오래된 곰탕집들이 모여 있다. 영산포에는 홍어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곳 식당에서는 홍어 내장 중에서도 간과 보리 싹을 듬뿍 넣어 끓이는 보리애국과 홍어삼합, 무침, 튀김, 전, 찜에 보리애국까지 포함된 홍어정식이 주요 메뉴다. 일제 강점기 조선식산은행 건물을 개조한 영산포 역사갤러리는 홍어와 영산포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인근에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이자 강변 등대인 영산포등대(사진)가 있다. 1915년에 설치돼 수산물·곡물 등을 싣고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8㎞ 뱃길을 오가던 배의 길잡이 역할과 영산강의 수위를 재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 영산강 하굿둑 건설로 1977년 마지막 배가 끊어지고 수위가 낮아지면서 추억의 상징물로 남았다.

나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전문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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