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배병우] 평화경제, 공허하다

국민일보

[여의춘추-배병우] 평화경제, 공허하다

입력 2019-08-16 04:01

경협=대박이라는 환상과 희망적 사고에 기반
극일한다며 자립경제와 ‘우리 민족끼리’로 가면 미래 없어
한국 경제 50년 성공 비결은 개방과 경쟁이었다는 점을 늘 잊지 말아야


애국자는 아니지만, 요즘처럼 나라 사정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걸 지켜보는 건 참담하다. 경제 외교 안보 등 국정의 전 분야가 해체와 추락의 경보음을 내고 있다. 공무원으로 해외에 장기 파견 나간 후배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반가운 마음에 메일을 열었더니 “형, 나라 걱정돼요. 언론이 잘 해줘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한다.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번 정부도 집권하면서 거대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소득주도성장, 남북 화해협력과 북한 비핵화, 나라다운 나라, 포용사회 등이다. 나라와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냄새를 강하게 풍겼던 이 과제들 대부분이 이제 ‘실패’나 ‘전도(顚倒)’ 판정을 받고 있다. 경제의 기초 체력은 쇠락했고, 한국 외교는 동북아의 미아가 됐다. 핵과 미사일을 더욱 세게 움켜쥔 북한은 남한을 대신해 ‘한반도의 운전자’가 됐다. 사회 갈등은 위험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를 비판하면 친일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생각해보니 집권한 지 2년을 갓 넘겼다. 대통령 임기의 반환점은 오는 11월 10일이다. 앞으로 남은 2년9개월이 막막하다.

가장 불안한 건 대통령과 여권 핵심들이 나라를 이끌고 가려는 방향이다. 어떤 때는 목표도 없이 그냥 표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수준은 아니다’라는 듯 갑작스럽게 내놓는 국정 청사진이 가슴을 더욱 졸아들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른바 ‘평화경제’ 언급이 그렇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남북 간 경제 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평화경제를 통해 우리 경제의 신성장동력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 발언이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평화가 경제다’ 등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일본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을 세계 최빈국 북한과의 경제협력에서 찾는 발상은 정말 놀랍다. 이 발언 뒤에 “일본과 비교해 한국은 경제 규모와 내수시장에서 열세인데 경협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다”며 근거를 대는 걸 보면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

극일을 위한 평화경제는 환상과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 위에 서 있다. 단단한 현실이 없다. 우선, 1인당 국민소득 격차가 최소 14배, 최대 30배에 달하는 남북한 사이에 정상적인 무역 관계가 이뤄지기 어렵다. 북한 김일성대에서 공부한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경제 격차를 감안할 때 한국 정부가 일컫는 경협은 ‘대북(對北) 경제원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다. 한국 경제에 시급한 것은 구매력이 없는 이웃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 전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첨단기술이다.

둘째, 우여곡절 끝에 북한과 경협이 이뤄진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자연스럽게 북한이 우리가 상정하는 개혁·개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북한 전문가 상당수는 김정은이 베트남이나 중국식 개혁 개방을 추진할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본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주민 감시와 단속이 용이하고 외부 정보 유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김정은은 개성공단 같은 단절형 경제특구를 늘리는 것을 생각한다고 했다. 란코프 교수는 이를 ‘(정치적) 개방 없는 개혁’이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하면 북한 비핵화 협상이 성공하더라도 한국이 생각하는 개혁·개방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남북 경협을 위해 북한이 요구할 철도와 전력 등 인프라 재건을 위한 막대한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통연구원은 남북한 철도 통합에 최장 30년간 160조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한다. 2014년 금융위원회는 북한의 인프라 개발 비용을 철도 773억 달러, 도로 374억 달러, 전력 104억 달러 등 1400억 달러(약 169조7900억원)로 추정한 바 있다. 대통령 말대로 북한이 한국의 내수시장이 되려면 이처럼 고차원 방정식을 몇 개나 풀어야 하고, 천문학적인 재원과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경협은 대박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건 문 대통령의 평화경제론 근저에 자립경제 선호와 ‘우리 민족끼리’ 정서가 깔려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같은 민족인 북한과 잘해볼 수밖에 없고 자립경제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흐르면 곤란하다.

소재·부품 국산화 주장도 지나치면 자립경제론으로 흐를 수 있다. 핵심 소재·부품의 국산화율을 올려 외부 리스크를 줄이는 건 맞지만 모든 소재·부품을 국산화할 수는 없다. 그리고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 개방경제에서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극일을 위해 여러 방안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또 다른 극단이어서는 안 된다. 지난 50년 한국 경제의 성공은 개방과 경쟁,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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