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꿈의 무게

국민일보

[시온의 소리] 꿈의 무게

입력 2019-08-2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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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올여름 상영 중인 영화 제목이다. 아직 안 본 분들도 많고 특정 영화를 홍보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다만 우연히 홀로 본 영화에서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얻게 되어 예고편이 이미 드러난 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본다. 영화의 남자주인공 ‘용남’은 위로 누나를 셋 둔 독자다. 부모로서는 아무래도 관심과 기대가 남달랐으리라. 그런데 평일 대낮에 철봉에 열중하는 모습이나 짝다리를 하고 설거지하는 것을 보니 대충 현재 상황을 짐작할 만했다. ‘내일 어머니 칠순 잔치에 일가친척 다 모일 텐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는 큰누나가 걱정되어 전날 점검을 나왔다가 더부룩해진 머리를 위로 묶은 채 늘어져 있는 동생의 모습에 등짝을 때렸다. ‘자랑할 거리는 없어도 깔끔하기는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옷장을 뒤지다가 버럭 화까지 낸다. “야, 이게 다 뭐야? 아직도 안 버렸어?” 동아리를 하려면 취직에 도움이 되는 걸 할 일이지 산악동아리가 뭐냐며 다 버리라는 누나의 말에, 이제껏 순하게 등짝도 내어주고 욕도 얻어먹던 용남이 벌떡 일어나 누나를 방 밖으로 내민다. 용남에게 저 장비들은 그냥 고철이 아닌 거다. 과거의 좋은 기억이든 현재의 위로이든 아니면 미래의 소망이든, 용남에게 장비들의 무게는 무거운 것임이 영화 초반부터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영화’겠지만,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서 맞닥뜨린 비상사태는 용남의 암벽등반 기술, 그것도 매일 게으름 없이 철봉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했다. 늘 ‘낙방만 하는 백수’ 용남이 미덥지 못했던 일가친척들도 점점 그의 말에 일사불란 의지하고 협조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가족들을 다 구하긴 했지만 구조헬기가 지탱할 수 있는 무게를 넘었고, 용남은 결국 대학시절 산악동아리 후배였고 지금은 패밀리 레스토랑 부점장인 ‘의주’와 함께 재난 현장에 남게 된다. 이후 영화는 오늘의 청춘을 대변하는 두 남녀를 통해 아슬아슬하고 짠하지만 소망스러운 탈출기를 펼쳐 보였다.

“이번 생은 망했어요.” “어차피 계획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데 아무리 작은 행복이라도 내가 결정하고 조정할 수 있는 확실한 것(소확행)을 즐기며 살래요.” 요즘 청년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어른들은 이들을 향해 패기가 없다고 혀를 차시지만, 사실 청년들이 ‘일상의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말하자면 지면이 다 모자란다. “말이 부점장이지 알바생이나 다름없어.”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직업의식 투철한 의주였지만 그녀의 계약 상태를 알만한 멘트였다. 건물주의 아들이 점장으로 설렁설렁 취미 삼아 운영하는 곳에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성희롱뿐이었다. 그런데 가족을 살리기 위해 빌딩 밖으로 줄을 매는 용남을 보며 어디론가 뛰어갔다가 의주가 가져온 꾸러미를 보니 어렴풋이 그녀의 꿈도 짐작이 되었다. 이미 건너편 빌딩에 가 있는 용남에게 힘껏 던진 그 꾸러미에는 암벽 등반할 때 미끄러지지 말라고 바르는 분필가루와 아주 작은 장비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밧줄과 사람을 안전하게 연결하는 장치다. 패밀리 레스토랑 부점장에게는 필요 없는 장비다. 의주가 차마 버리지 못한 꿈이었을 거다.

영화 끝부분,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완등’(등산 시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을 한 뒤에 고마웠다며 장비를 돌려주는 용남에게 의주는 말했다. “다음에, 다음에 만날 때 돌려줘. 지금 가지고 가기엔 너무 무거워.” 둘의 관계가 발전하리라는 힌트가 담긴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꿈의 무게가 달라졌다는 말로도 읽혔다. 꿈, 지금 당장 실천하기엔 어림없지만 한층 무거워진 그 무게는 앞으로 의주의 삶을 달라지게 만들 것 같다.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당장 결심할 수도 시작할 수도 없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맛본 꿈의 성취는 의주를 분명 달라지게 했다. 그러니 오늘의 청춘은, 아니 백세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비로소 살아있는 듯 생기 있게 살아낼 수 있는 우리의 꿈 말이다. 그 무게가 있어야 나를 잃고 이리저리 떠밀려 살지 않을 테니.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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