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대열 (16) 철책선과 험한 산지 넘어 자유의 땅 홍콩으로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유대열 (16) 철책선과 험한 산지 넘어 자유의 땅 홍콩으로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신변 보호 위해 망명 대신 바다 건너 몰래 들어 가기로

입력 2019-08-26 00:06
  • 미션라이프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유대열 목사가 2009년 10월 서울 남포교회에서 하나로청년회 회원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도모코 누님이 일본으로 돌아간 때가 1996년 1월이었다. 그 무렵 중국 신문들에는 1997년 7월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다는 소식이 계속 실리고 있었다. 홍콩으로 가면 인권을 존중받고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날부터 집 근처에 있던 샹그릴라 호텔로 가 각종 신문과 잡지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는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에 아주 자그맣게 탈북자 소식이 하나 실렸다. 홍콩으로 넘어가 경찰에 단속되자마자 남한으로의 망명을 요구했고 현재는 홍콩 당국으로부터 보호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시 나는 단파 라디오를 구매해 매일 BBC나 VOA 방송을 들었는데 늘 ‘자유와 기회의 나라 미국’을 외치며 방송이 시작됐다. 그 말이 내겐 너무 소중하게 들렸다. 그때마다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 제게도 자유의 길을 열어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세요. 자유의 땅에 가고 싶습니다.’ 도모코 누님이 주고 간 한국찬송가 테이프도 그런 내 마음을 위로해줬다. 잔잔히 들려오는 찬송을 들으며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내 무거운 짐을 주님께 다 드립니다. 주님만 따라갑니다’라며 매일같이 눈물로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됐다. 다른 탈북자들은 육로를 통해 홍콩에 간 뒤 경찰에 잡혀 합법적 절차를 밟고 망명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신변을 위해선 바다를 건너 몰래 들어가야 했다. 홍콩으로 간 뒤엔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홍콩으로 가려면 베이징에서 기차로 광저우까지 간 뒤 선전 경제특구를 통과해야 한다. 선전 경제특구는 일반인은 들어갈 수가 없기에 철책선을 불법으로 통과한 뒤 험한 산지를 지나야 한다. 이를 안 당시 하숙집의 중국인 주인 내외는 나를 위해 배낭을 마련해줬다. 나를 친동생처럼 여겨 준 분들이었다. 주인 누님은 일반 배낭을 손수 위장용 배낭처럼 만들어줬다. 주인 형님은 휴가까지 내고 나와 선전까지 같이 가주기로 했다. 실제로 난 주인 형님 덕에 열차의 검문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광저우에 무사히 도착한 우린 근처에서 하루를 묵었다. 거기서 난 해발 1000m 높이의 가파른 우퉁산을 넘기로 계획을 짰다. 적의 감시와 경계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원칙이 험한 노정을 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우린 선전지구 철책이 깔린 산골짜기 작은 마을로 갔다. 철책 앞에서 주인 형님과 작별을 고했다. 그가 “꼭 살아나야 해, 그리고 다시 만나”라며 인사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비탈길을 돌아 내려갔다. 철책에 이르러 난 서둘러 철책의 철사를 하나씩 잘랐다. 몸 하나가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이 생기고 뒤를 돌아봤다. 3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환갑쯤 돼 보이는 노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지체할 수 없었다. 서둘러 철책을 넘은 뒤 수풀을 헤치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추격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노인이 고발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고마웠다. 혹시 내 눈빛에서 간절함과 진실함을 봤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내가 통과해야 하는 산길은 상상외로 험했다. 그곳은 아열대 기후의 산지로 특별경계지역으로 지정돼 20년 넘게 사람의 접근을 금지한 지역이었다.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수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졌지만 길을 내가며 조금씩 산을 넘기 시작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