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인도 계속하기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

국민일보

집회 인도 계속하기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10>

입력 2019-09-05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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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균 서울 대망교회 목사(왼쪽)와 홍예숙 사모(가운데)가 지난 30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열린 금요치유집회 도중 발작을 일으킨 학생을 위해 신유기도를 하고 있다.

1986년 네팔에서 사역을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동안 집을 비웠더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회에 출석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도원 출입으로 몇 년 전 교회에서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고신 교단은 기도원에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만나기 위해 대구 주암산기도원에 오간 것이 문제가 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지만 마음에 늘 주의 종이 되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다. 그 일을 두고 눈물로 기도를 참 많이 하셨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아시는 목사님이 집에 들렀다가 우리 집 사정을 들으시고 신학을 권유한 것이다.

그 목사님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목사님이셨기에 아버지는 지방의 성결교신학교에 편입했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하는 동시에 함양반석성결교회를 개척했다. 1985년의 일이다.

귀국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사역을 돕게 됐다. 처음에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나이도 어렸고 미국에서 주로 사역했기에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만나는 목사님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놀라운 신유의 역사에 감동했고,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목포 광주 포항 등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학교 문제였다. 그동안은 미국을 왕래하며 가끔 학교에 들러 1주일 정도 수업에 참석하고 시험만 치면 됐다. 함양여중까지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됐다. 학업을 위해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야 했고, 주의 일을 하면서 공부를 부업으로 삼으려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야 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실업계를 가야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참 괴로웠다. “하나님, 이제껏 저를 쓰셨으니 잠깐만 공부해도 될까요. 공부하고 나서 나중에 좀 쓰시면 안 되실까요. 그럼 더 하나님 일을 잘할 수 있잖아요.”

그때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학업 문제가 풀리지 않으니 내 처지가 깜깜한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개척교회에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니 참 난감했다. 이상하고 신기할 정도였다.

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학교를 다녀오면 환자들이 교회당을 가득 메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희귀한 환자가 다 왔다. 암은 흔한 질병이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파킨슨병, 루게릭병, 폐병, 자폐증 등 질병을 안고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가방을 던져놓고 기도해야 했다. 교회는 개척교회가 아닌 것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당시에는 곤고함이 느껴졌다. 학교에 가면 공부를 해야 했고 집에 오면 환자들과 씨름해야 했다. 다른 지역 부흥회도 가야 했다. 게다가 부흥회는 일정상 제한이 많았다. 학교문제 때문이었다.

그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실업계는 인문계와 달리 기본 자격증만 취득하면 인문계 공부도 개인적으로 할 수 있고 취업도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부흥회에 나가는 것만 하나님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환자를 위해 기도하고 치료하는 일은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마음이 곤고했고 살맛이 나지 않았다.

실업계가 있는 함양종합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부기, 주산, 타자 연습에 매달렸다. 생소한 과목인지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암기하며 주산 알을 튕겼다. 마음껏 날아다니던 새가 새장에 갇힌 듯 답답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때 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와 주셨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도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질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가 맺히느니라.” 눈물이 쏟아졌다. 감사해야 했다. 하나님께 학교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아버지, 학교 가요. 나 혼자 보내지 마시고 아버지도 함께 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는 학생을 사귀기는 쉽지 않았다. 친했던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인문계로 가버린 이유가 컸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학교생활에 점차 적응했다. 학교 갔다 와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됐다.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같은 반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고 선생님도 예뻐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학교에 함께 가셔서 생활해 주시고 도와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학교 때처럼 가끔 학교에 오면서 의사소견서만 제출하고 병원에 가 있으면 안 될까요?” 고등학교에선 그런 사유가 통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주셨고 교장 선생님까지 내 편이 돼주셨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입도록 일해 주신 것이다.

마침내 길이 열렸다. 취직을 위해 잠시 임시직으로 일했다는 증명서만 받아오면 출석하지 않아도 수업 대체가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증명서는 집회현장에서 만나는 사업가들이 써줬다.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신유집회를 진행하는 데 자유함을 얻게 됐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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