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시류와, 이단과는 타협 없다” 의로워 외로웠던 실천가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시류와, 이단과는 타협 없다” 의로워 외로웠던 실천가

신학자 신사훈과 서울 명륜동 새싹장로교회

입력 2019-09-0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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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80년대 신흥종교에 맞섰던 신학자 신사훈 교수가 설립한 서울 성균관대 옆 새싹장로교회 현재 모습. 지금은 교회가 폐쇄됐다. 그는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 신흥종교 추종자들로부터 무릎을 꿇리는 수모를 당했다.

서울 성균관대 입구에서 학교 정문을 향해 걷다가 정문 즈음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성대와 창경궁 담 사이의 길이 이어진다. 세모꼴 마을의 막다른 길이다. 길 끝은 성대 캠퍼스와 창경궁으로 막혔다. 그 막힌 지점에 절개지를 파고든 기형적 형태의 옛 우물이 어떠한 설명도 없이 보존돼 있는데 주민들은 ‘왕의 우물’이라 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한다.

서울 새싹교회 지하에서 성경 원전 공부 지도(1989년).

그 우물 앞으로 평범한 2층 양옥이 자리한다. 예전 새싹장로교회다. 지금은 성대생을 주 입주자로 받는 원룸형 양옥이 됐다. 이 새싹교회는 2000년대 초반 시나브로 폐쇄됐다. 1950~80년대 한국 사회와 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박태선 문선명을 둘러싼 이단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신사훈(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박사가 담임 목사로 있던 곳이다.

신사훈 (1911~1998)

신사훈의 ‘나의 투쟁’은 외롭기 짝이 없었다.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흉악한 이단 사냥꾼”이라고 몰아붙였고 기성 교단은 ‘그의 투쟁’을 ‘대화’라는 장으로 이끌려 했다.

어찌 됐든 그는 강연장에서 인분 투척에 따른 수모를 당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기독교이단연구자 탁명환(1937~1994·전 한국종교문제연구소장)처럼 누군가의 표적이 돼 살아야 했다. 탁 전 소장은 결국 이단 교회 신도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요즘 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전쟁 중이다. 멀쩡한 예배당이 이단에 접수되는 경우가 적잖다. 예배당 건축을 무리하게 하다가 매물로 내놓으면 이단이 매입하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정통 신학교조차 이단에 넘어간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 출입문에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 스티커를 붙였다.

15개 언어 독해 ‘진짜 박사’

1957년 11월 7일 동아일보 가정면. ‘여성과 신흥종교’라는 큼지막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그 긴 기사의 바이라인이 ‘S記’이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신사훈 교수의 글이다.

‘사교성을 띤 신흥종교의 80%는 부녀자층이다. 경상도의 천지대안교, 충청도의 백백교, 전라도의 태극도 등이 신앙의 자유에 편승한 대표적인 것들인데… 사변(6·25전쟁) 후 근대화된 신흥종교에 휘몰린 광신도들이 끼치는 해독은 과거와 족히 비할 바 없는… 근대화된 신흥종교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외래 종교를 비롯하여 문선명씨의 통일교회 그리고 요즘 사회문제까지 되고 있는 박태선씨의 감람나무교(혹은 전도관)운동 등을 말하는 모양이다.…’

S 즉 신사훈은 이 글에서 자신이 책 ‘이단과 현대의 비판’에서 쓴 주장을 마치 다른 사람 얘기처럼 옮겼다. 그만큼 이단 지칭 문제는 민감하고 위험했다.

신사훈은 이단 감별 종교운동가가 아니었다. 신학자였다. 이단 문제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가 “한 세기를 빨리 태어난 분과 같은 천재성을 지녔다”며 “그의 앞서간 신학 체계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학자 겸 철학자 도올 김용옥을 비슷한 학자 유형으로 들었다.

신사훈 고창 생가. 명창 신재효가 살던 집. 경향신문 제공

신사훈은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1812~84)의 현손이다. 전북 고창읍성 앞 신재효 고택에서 자라 당시 명문 고창고보를 나온 수재였다. 그는 새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고보 시절 영어교사가 영어 성경을 권하자 경성에 신약성경을 주문해 읽을 정도였다. 졸업할 때까지 25번 성경을 통독했다. 그는 그 시절 교회에서 기도로 날을 새다시피 해 ‘신사무엘’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창읍성이 산기도 장소였다.

고창고보 동창회. 가운뎃줄 왼쪽 세 번째가 시인 서정주, 그 다음이 신사훈(1982년). 경향신문 제공

그는 언어·수학 등에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우등·수석을 놓치는 적이 없었다.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대학에서 성경 원전을 읽기 위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불어 독어를 독파해 깨쳤다. 그리고 1937년 미국 드루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마쳤다. ‘희랍어 상’ ‘팔레스타인 연구상’ ‘신학학술상’ 등을 받은 한국인 수재였다. 뉴욕대학과 스탠퍼드대학 교수(1942~1945)도 역임했다. 15개 언어 독해가 가능했다. “박사 중에 진짜 박사”라는 평이 따랐다.

미국 유학 시절(1945년 무렵) 모습.

그는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 학장(1946~47)을 거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1947~76)로 봉직했다. 미 군정과 5·16 군사정부가 그를 영입하려 끈질기게 노력했으나 “내가 그런 시시한 것을 왜 해”라며 거절했다. 그는 신학자·목회자의 길만 걷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대 기독 학생들에게 국산품 애용 등 신생활운동을 주창하며 인간의 내적 개조를 촉구했다. ‘통일론’ 연구 등을 통해 공산주의는 배척했다. “타국 공산주의는 자국 위주 것들인데 우리는 사대사상과 외세를 이용하는 악질로 김일성이 그러하다”고 분개했다. ‘공산주의 비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의의’ 등의 저서 제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근처 풍산공원묘지 안에 있는 신사훈 묘와 비석. 신세희 제공

신사훈은 비성서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박태선과 문선명은 타협 대상이 아니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함석헌(1901~89·기독교사상가)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측과는 불화를 겪었다. 어쩌면 결이 다른 지식인의 신앙적 신념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우군 없는 외로운 싸움에서 돈키호테처럼 비치기도 했다.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 소망이 없다”

그는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으니 새싹운동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드러나지 않는 신흥종교들이 기성 교단에 끼어들어 특히 부녀자들을 흔들고 있는데 대부분은 그들도(이단들도) 역시 기성 종교들이 부패하고 낡았다고 주장한다”는 그의 분석은 마치 요즘 교계 현실의 실사판이라고 해야겠다.

서울 명륜동 천부교 명륜교회(흰색 건물) 골목. 새싹교회 반대편에 있다.

그는 결국 똥물을 뒤집어썼다. 68년 서울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에서 문리대 주최로 열린 ‘유사종교 비판강연회’에서 인분 테러를 당한 것이다. 79년 4월에는 서울 남대문교회 교육관 신앙강좌에서 폭행 사건도 겪었다. 새싹교회 강단에 들이닥친 반대파들이 “신 독사!”라고 외치며 붙잡아 꿇어 앉히고 자신들에 대해 비방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가 서울대 교수 정년을 앞두고 있을 때 기자들이 은퇴 후 어떻게 살지를 물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살다 죽는 게 내 생의 목표입니다.” 아들 신세희 전 중앙대 교수는 “아버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의로운 삶을 사신 분으로 오직 복음에 목숨 건 분이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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