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모·버스안내양·여공… 지금은 사라진 삼순이를 아시나요

국민일보

식모·버스안내양·여공… 지금은 사라진 삼순이를 아시나요

[책과 길] 삼순이/정찬일 지음/책과함께, 524쪽, 2만5000원

입력 2019-09-07 04:01
여공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사진은 1970년대 기독교 교육기관인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찍은 단체사진. 이곳에서는 노동조합 여성 간부들을 상대로 노동교육을 실시하곤 했다. 책과함께 제공

1960년대 한국인의 삶이 어땠는지는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이들이라도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60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78달러. 대한민국은 지구촌에서 손꼽히는 빈곤국이었고 미래는 암울했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살피면 낯선 장면을 만나게 된다. 대다수가 가난한 시절이었는데, 상당수 가정에서는 식모를 두었다.

한 일간지는 66년 서울에서만 100가구당 22가구가 식모를 쓴다고 보도했다. 이듬해엔 “서울 성북구의 한 표본조사에 의하면 셋방 사는 가구의 7할 5푼이 식모를 두고 있다”는 기사도 나왔다. 참고로 당시 성북구는 판자촌의 대명사였다.

이쯤 되면 누구든 의아할 것이다. 왜 이렇게 식모가 많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인건비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당시 식모는 숙식 해결이 가능한 일자리였다. 아예 돈을 주지 않고도, 잠자리와 식사만 제공해도 식모를 하려는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그렇다면 그 많던 식모는 어디로 갔을까. 한발 더 나아가 산업화 시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버스안내양이나 여공은 언제부터 사라진 것일까. ‘삼순이’는 바로 이 질문에 답하는 신간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잊힌 존재가 된 여성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순이는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을 아우르는 단어로 한때 사람들은 식모를 ‘식순이’라고, 버스안내양과 여공은 각각 ‘차순이’ ‘공순이’라고 불렀었다.

식모 이야기를 더 이어가보자. 당시 한국인의 “빈곤 탈출 전략”은 두 가지였다. ①계층 상승에 성공하거나 ②가족 누군가를 밖으로 내보내 생활비를 아끼거나. ①번의 돌파구는 교육이었다. 남존여비 탓에 아들들이 진학을 통해 계급 상승의 사다리를 밟을 기회를 얻었다. 딸은 ②번의 피해자가 됐다. 많은 소녀가 “한 입 덜기의 최전선”으로 내몰렸다.

상당 기간 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 개찰구에서 나온 상경 소녀들은 알을 깨고 바다로 향하는 새끼 거북이와 같은 처지”였다. 엉터리 신문 광고에 홀려서, 누군가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윤락업소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다. 식모 자리를 구하더라도 삶이 팍팍하긴 매한가지였다. 61년 보건사회부가 식모 257명을 상대로 벌인 실태조사를 보면, 대다수는 15시간 이상 일하고 휴일도 거의 없었다.

“식모의 전성시대”가 한국전쟁 이후부터 70년대 중반까지였다면 버스안내양과 여공이 맹활약한 시기는 각각 6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초반,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였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버스안내양을 다룬 두 번째 챕터일 듯하다.

영화 ‘도시로 간 처녀’(1981)에서 버스안내양이 몸수색을 당하는 장면. 책과함께 제공

그 시절 버스안내양은 “사회적 노출 빈도가 가장 높은 직업여성”이었기에 정부나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형편없었다. 근무는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형태였는데, 승무일 근로 시간은 18시간을 넘길 때가 많았다. 기숙사 시설은 열악했고 월급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버스안내양을 그만두는 여성들이 퇴직 사유로 첫손에 꼽았던 건 “인간적인 대우가 나빠서”였다.

“삥땅”을 둘러싼 사용자와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업체들은 안내양들이 “삥땅”을 일삼는다고 여겼다. 몸수색을 자주 벌였다. 아무리 뒤져도 돈이 나오지 않을 땐 속옷까지 벗기고 검신을 했다. 당시 안내양들 사이에서 “목욕탕 갔다”는 몸수색의 은어였다. 억울하고 분했던 안내양들은 한강에 투신했고, 할복자살을 시도했고, ‘알몸 농성’이라는 극한투쟁을 벌였다.

삼순이 가운데 시대적으로 막내뻘이라고 할 수 있는 여공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수출전사” “산업역군”이라는 단어는 허울뿐이었다. 책에 담긴 인상적인 이야기로는 이런 대목을 꼽을 수 있다. 76년 출시된 빵 ‘보름달’은 싼값(100원)에 양도 많고 맛도 달콤해 시장을 석권했다. YH무역 여공들은 밤 10시까지 야근하면 야식으로 보름달을 받았는데, 고향에 있는 동생을 떠올리면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다. 빵을 모아서 보내고 싶었지만 모으다 보면 빵이 상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시작한 게 ‘빵계’다. 빵이 나오는 날 10명이 한 사람에게 보름달을 몰아주고, 이튿날에는 다음 사람에게 빵을 모아주곤 했다. 빵계는 “눈물 젖은 빵”이라는 표현에 가장 걸맞은 경우일 것이다.


이렇듯 책에는 그 옛날 우리네 어머니 누나 언니 여동생의 삶이 담겨 있다. 책을 펴낸 정창일은 ‘비이성의 세계사’ ‘우당 이회영’ 등 역사서를 주로 펴낸 저술가로 10여년 전 그 많던 버스안내양들이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다가 책을 쓰게 됐다. 그는 감상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사실만 기다랗게 늘어놓는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적잖은 감동을 받게 된다. ‘진짜 역사책’을 마주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저자는 “화려한 경제 개발의 그늘에서 그들(삼순이)은 이름과 달리 ‘순’하게 살 수 없었다. 그들의 청춘은 화창한 봄날이 아니었다”고 적었다. 올가을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든 저 말에 담긴 속뜻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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