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10년 전부터 도전한 숙제 같은 작품… 이제 마음 가벼워요”

국민일보

은희경 “10년 전부터 도전한 숙제 같은 작품… 이제 마음 가벼워요”

7년 만에 장편 ‘빛의 과거’ 발표

입력 2019-09-08 19:04
최근 자전적 이야기가 녹아 있는 장편 ‘빛의 과거’를 펴낸 소설가 은희경. 그는 “그동안 소설을 쓰면서 작가인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은 그럴 수가 없었다”며 “소설의 주인공은 20대의 내 모습과 많이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종학 선임기자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게.”

소설가 은희경(60)은 독자가 사인을 부탁하면 가끔 저런 문구를 적어주곤 한다. 시인 정지용이 남긴 구절을 가져온 것인데, 여기엔 은희경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의미도 담겨있는 듯하다. 그는 삶이 아무리 구질구질해도 징징대지 않으면서 냉소와 유머를 곁들여 인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은희경이 최근 발표한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 역시 마찬가지다. 은희경을 소개한 출판사 보도자료엔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 문학의 빛나는 고유명사.” 은희경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누구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한국문학에서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가 됐으니까.


빛의 과거는 은희경이 ‘태연한 인생’(2012) 이후 7년 만에 펴낸 신작 장편이다. 소설은 1977년 여대 기숙사와 2017년의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왜 제목이 ‘빛의 과거’일까. 지난 3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은희경은 “빛이라는 건 오래전에 출발해서 지금, 여기에 닿은 것 아니냐”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빛을 떠올렸다”고 답했다.

소설의 줄거리를 개괄하자면 이렇다. 77년 이야기에선 무엇을 해도 서툰 기숙사 여대생들이 어떻게 서로의 “다름”을 느끼면서 “섞임”의 과정을 통과하는지 담겨 있다. 여기까지는 그 시절 풍속화를 그린 것처럼 여겨지는데, 2017년 스토리가 더해지면서 소설은 크게 출렁인다.

주인공 유경은 친구 희진이 펴낸 소설을 읽게 된다. 유경과 희진은 40년 전 기숙사 친구였는데, 희진이 당시 시절을 소재로 쓴 작품 속 유경은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아주 달랐다. 비겁하고 징징거리는 “공주”일 뿐이었다. 작가는 왜 이런 구도를 만든 것일까. 은희경은 이런 질문에 “과거를 복원하려고 쓴 작품이 아니다”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77년 이야기만 하면 세태소설 수준에 그칠 거로 생각했어요. 2017년 ‘현재’의 주인공이 과거를 돌아보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희진을 등장시키지 않았다면, 소설은 유경이 자신을 변명하는 수준에 그쳤을 거예요. 희진을 통해 유경의 명암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빛의 과거에는 은희경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녹아 있다. 유경이 그렇듯 은희경은 대학 진학을 위해 지방에서 상경했고, (작품 속 배경이기도 한) 숙명여대 기숙사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은희경에게 빛의 과거는 오랫동안 가슴을 짓누른 숙제 같은 소설이었다.

“10년 전부터 이 소설을 쓰려고 도전했어요. 하지만 계속 실패했죠. 시간을 끌수록 더 많은 ‘디테일’이 떠오르고, 참고 자료는 많아지고, 이야기의 길을 어떻게 내야 할지는 막연하고….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요. 이제 어떤 소설이든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은희경은 95년 첫 장편 ‘새의 선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은희경을 소개한 기사에는 “대형 신인”이라거나 “문단의 신데렐라” 같은 수식어가 붙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수식어는 엉터리가 아니었다. 은희경은 이후 20여년 동안 수준급의 작품을 쏟아냈다. 현재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일급의 작가다.

“어느 시기부터 그런 질문을 받곤 해요. ‘아직도 쓸 게 있나요?’ 저는 근데 이런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쓸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어요. 소설가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고, 저는 모두에게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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