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과 현대건축의 만남… 예술로 치장한 덕수궁

국민일보

문화유산과 현대건축의 만남… 예술로 치장한 덕수궁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국내외 5명 건축가 설치 작품 전시

입력 2019-09-08 19:03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래선지 몇 년 뒤인 1902년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8폭 병풍 ‘고종임인진연도병(高宗壬寅進宴圖屛)’을 보노라면 격동의 시대를 사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다.

그때 왕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던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 앞마당에는 지금 일산(황제가 행차할 때 받치던 큰 양산)을 연상시키는 설치작품이 도열해 있다. 작가 그룹 오비비에이(OBBA·곽상준 이소정)의 ‘대한연향(大韓宴享)’이다. 오색 반사필름을 줄줄이 매달았는데, 시시각각 다른 색을 반사하고, ‘양산’ 안에 들어서면 바람에 필름이 흔들리는 소리가 ‘차르르~’ 귓가를 스친다.

밤의 덕수궁이 국내외 건축가들이 참여해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로 빛난다. 사진은 한국 작가 그룹 오비비에이(OBBA·곽상준 이소정)의 ‘대한연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덕수궁이 현대미술을 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문화재청과 손잡고 진행하는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다. 2012년, 2017년 이곳에서 간헐적으로 진행한 ‘덕수궁 야외 프로젝트’의 연장인데, 이번엔 국내외 5명(팀) 건축가를 초청해 건축전 형식으로 풀었다. 또 전시장소도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마당까지 확대했다. 한 마디로 문화유산과 현대건축의 만남이다.

작품 수를 최소화해 덕수궁의 위엄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 장점이다. 덕수궁을 찾으면 늘 석조전 구관과 신관 사이의 분수대, 그리고 지금 덕수궁미술관으로 쓰이는 신관을 잇는 동선으로 습관처럼 움직이게 된다. 작품이 설치된 장소 덕분에 빤했던 동선을 벗어나 덕수궁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구한말 격동기의 시대사 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도 이번 전시의 미덕이다.

태국 작가 그룹 스페이스 파퓰러의 영상 작품 ‘밝은 빛들의 문’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맨 먼저 대한문으로 입장하면 오른쪽에 ‘광명문(光明門)’이 나타난다. 왕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으로, 일제강점기 덕수궁 구석으로 밀려났다가 지난 3월 8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광명문에는 태국 작가 그룹 스페이스 파퓰러(라라 레스메스, 프레드리크 헬베리)의 영상 작품 ‘밝은 빛들의 문’이 설치돼 있다. 단청과 하회탈 등에서 따온 이미지들이 미닫이, 혹은 여닫이로 ‘문안의 문’처럼 스르륵 열린다.

홍콩 건축가 CL3의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함녕전 앞마당에는 황실의 가마와 가구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가구들이 널려 있다. 홍콩 건축가 CL3(윌리엄 림)의 작품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인데, 관람객들은 작품에 반영된 보료 차양 등을 보며 근대와 현대의 시공간에 동시에 서 있는 기분에 젖어 들 수 있다.

마지막 석조전 분수대 앞 잔디밭에는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비엔날레 대만관 대표 작가인 대만계 캐나다 건축가 뷰로 스펙타큘러(히메네즈 라이)의 설치 작품 ‘미래의 고고학자’가 있다. 미끄럼틀 모양을 한 구조물에 올라가 석조전을 조망하는 특권은 이번 전시가 아니고선 맛볼 수 없는 경험이다. 작가는 “고고학의 기본은 땅을 파는 행위다. 로마시대 지층을 연구하려면 6m까지 땅을 파야 한다”면서 “제 작품은 일부러 3m 높이로 했다. 그러니 미래의 어느 세대에는 이 구조물도 지하가 되는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석조전을 바라보며 서구 열강의 각축 속에서도 부국강병의 제국의 꿈을 가졌던 고종 시대의 역동성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삼청동 서울관 마당에서는 재미교포 건축가 제니퍼 리가 이끄는 오브라 아키텍츠의 초대형 파빌리온 온실 ‘영원한 봄’이 11일 공개된다. 파빌리온을 덮은 투명 반구체를 통해 빛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는 작품으로 ‘프라하의 봄’처럼 봄이 가지는 정치적 은유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함의한다.

전시 주제는 ‘기억된 미래(Unearthing future)’이다. ‘발굴한 미래’라는 영어 직역이 오히려 과거의 유산을 통해 미래를 탐구해본다는 전시의 취지에 더 들어맞는 것 같다. 야간에 보면 더 좋은 전시. 내년 4월 5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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