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절벽·오메가 물굽이… 아린 역사 품은 절경

국민일보

병풍 절벽·오메가 물굽이… 아린 역사 품은 절경

산 따라 물 따라… ‘始原의 땅’ 전북 진안

입력 2019-09-11 20:11
전북 진안군 죽도 일대를 드론으로 내려다본 모습. 왼쪽 아래에서 흘러온 구량천이 위쪽에서 가막천과 만나 오른쪽 아래로 오메가(Ω) 모양으로 흘러간다. 아래쪽 잘록한 곳이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잘려 나간 곳이다.

전북 진안은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어 산이 많고,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은 맘껏 굽어 흐른다. 섬진강이 발원하고, 전북 장수 뜬봉샘에서 시작된 금강의 최상류 물길이 지난다. 그 물줄기를 따라 몸과 마음에 청량한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

진안의 풍경에서 죽도(竹島)를 빼놓을 수 없다. 용담호로 흘러드는 금강 상류 지류에 있는 ‘육지 속 섬’이다. 장수 쪽에서 내려오는 가막천과 덕유산에서 흘러드는 구량천이 죽도 양옆을 감싸 안고 흐른다. 구량천은 죽도를 지나자마자 금강 상류에 몸을 섞는다.

죽도 가는 길은 험하다. 장전마을 버스정류장 인근 하천 방향으로 난 길을 따르면 죽도에 닿는다. 차를 두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좋다. 9000만년 전 백악기 중기 화산 폭발과 하천 침식으로 곡류하천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주변엔 수직 절벽이 발달해 절경을 빚어냈다. 죽도에 닿으면 가운데가 잘려 나간 절벽이 날카롭게 다가선다. 산줄기로 이어져 병풍바위 같던 곳을 원활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뭉텅 잘라내면서 섬 아닌 섬이 됐다. 죽도를 하늘에서 보면 ‘강물에 떠 있는 삿갓’처럼 보이고 강물은 오메가(Ω) 모양으로 흐른다.

이곳에 조선시대 비운의 정치가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꿈과 좌절이 서려 있다. 정여립은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서인 출신이었다. 율곡이 죽은 뒤 그는 동인으로 갈아탔고, 당시 왕인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됐다.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며 관직을 떠난 그는 고향(전북 전주) 인근인 진안으로 내려왔다.

정여립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으며,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당시 상황에서 용납하기 힘든 혁신적인 사상을 품었다. 그를 따르는 이들과 활쏘기 모임 등을 열었고, 조직은 점차 전국으로 확대됐다. 진안에 머물던 정여립은 대동계를 이끌고 배를 타고 노략질을 하러 온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가 조정에 날아들면서 참극이 시작됐다. 정여립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증도 없는 장계에 정여립은 1589년(선조 22년) 역모의 주동자로 몰렸다. 선조가 관군을 보내 체포하려 하자 정여립은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자결한 게 아니라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도 있다.

서인으로서는 득세하던 동인의 힘을 약화시키고, 권력을 잡는 기회가 됐다. 서인을 이끌던 송강 정철은 정여립과 조금만 관련 있는 자들을 대부분 죽음으로 내몰았다.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그의 편지가 발견됐다는 죄목으로,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과 9촌이라는 이유만으로 화를 면하지 못했다. 1589년부터 3년간 이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조선시대 4대 사화 희생자 500여명의 두 배인 1000여명이 희생당했다.

죽도는 산대나무가 많고 섬 앞에 천반산(天盤山·646.7m)이 죽순처럼 솟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천반산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복숭아를 받는 소반’ 같다고 해서 천반낙도(天盤落桃)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정상 부근에 넓은 벌이 형성돼 있고, 우물이 있어 정여립이 이곳에서 대동계 군사 훈련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진안군 백운면에 있는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과 표지석.

진안에 시원(始原)을 둔 물줄기는 섬진강이다.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면 선각산(1142m) 남쪽 오계치 기슭의 ‘데미샘’(800m)이다. 1983년 하천연구가 이형석씨가 실측한 결과(유하거리 223.86㎞)를 국토지리정보원이 공식 인증했다. 이전까지 택리지엔 마이산, 동국여지승람엔 지리산, 동아대백과사전엔 팔공산 등으로 발원지가 제각각이었다.

데미샘은 데미샘자연휴양림 입구에서 1.19㎞의 오솔길을 30~40분 정도 걸으면 닿는다. 직경이 두 뼘이 채 안 되는 작은 옹달샘이 있고, 곁엔 표지석도 서 있다.

천상데미정에서 바라본 선각산(왼쪽)과 삿갓봉.

‘데미’는 이 지역 말로 봉우리를 뜻하는 ‘더미’에서 왔다고 한다. 샘 동쪽에 솟은 작은 봉우리를 동네 주민들은 천상데미(1080m)라 부른다.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데미샘은 ‘천상봉에 있는 옹달샘’ 천상샘이다. 정상에는 ‘천상데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에서 장수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른쪽으로 멀리 서구이재 너머 팔공산이 우뚝하다. 반대쪽으로 오계치 너머 삿갓봉과 선각산이 내달린다.

▒ 여행메모
49번 지방도 옆길 도보 7분 ‘조망대’
데미샘자연휴양림에서 힐링·숙박


수도권에서 승용차를 이용해 진안 죽도로 간다면 경부고속도로와 통영대전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무주나들목에서 빠진다. 30번 국도를 따라 가다 신괴교차로에서 좌회전한 뒤 자산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10분쯤 가면 장전마을에 닿는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라면 죽도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용담댐 환경조각공원의 폐품을 이용한 작품.

천반산과 죽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도 마련돼 있다. 죽도교로 가는 49번 지방도로 고개 옆 공터에 지질공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난 숲길을 따라 7분 정도 걸으면 조망대가 나온다.

데미샘은 장수나들목에서 빠지는 것이 빠르다. 전북도가 조성한 데미샘자연휴양림을 찾아가면 된다. 휴양림은 약 2㎢의 넓은 부지에 숲속의집(10동), 한옥형 숙박시설(2동), 휴양관(1동 11객실), 숲문화마당, 명상의 숲, 물놀이장, 산책로, 북카페, 전망대 등 다양한 객실과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예약자에 한해 차량출입이 허용된다. 일반인은 입구에 마련된 무료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인근 신암리에 들어선 펜션을 숙소로 잡아도 좋다.

진안의 먹을거리로는 새끼돼지를 요리한 ‘애저찜’이 꼽힌다. 용담호 주변에는 직접 잡은 물고기로 신선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식당들이 여럿 있다.

진안=글·사진 남호철 여행전문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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