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권혜숙] 진짜 푸드 파이터

국민일보

[데스크시각-권혜숙] 진짜 푸드 파이터

입력 2019-09-12 04:01

제목을 보고 ‘오오, 그새 먹방의 신흥 강자가 등장했단 말인가’라는 기대감으로 이 글을 읽기 시작한 먹방 마니아가 있다면 사과드린다. ‘푸드 파이터(Food Fighter)’는 11일 막을 내린 제5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호주 사회사업가 로니 칸(67)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한 호주대사관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칸을 지난 6일 만났다. 한국에서는 대식가를 푸드 파이터라 부른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버려지는 먹거리와 싸우는 16년차 할머니 푸드 파이터다. 2004년 대형마트와 호텔, 레스토랑, 과수원에서 버려지지만 먹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식품을 수거해 소외계층에 나눠주는 사회적 기업 ‘오즈 하베스트’를 세웠다. 그렇게 매주 모이는 음식이 무려 100t으로, 50만명을 먹일 수 있는 양이다. 1년이면 2500만끼가 된다.

“원래 기업 행사를 대행하는 이벤트 회사를 운영했어요. 그러다 행사가 끝나면 남은 비싼 음식들이 그대로 버려지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전 세계에서 7억9500만명이 굶주리고 있는데, 식량의 3분의 1이 음식 쓰레기로 버려집니다. 말도 안 되지 않아요?”

성공한 사업가로 화려한 미식생활을 즐기던 그가 음식점이나 슈퍼마켓 쓰레기장을 뒤지는 게 일상이 됐다. 멀쩡한데 음식을 버리는 업체는 없는지 감시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곳을 기부에 동참할 파트너로 설득하기 위해서다. 마스크와 고무장갑, 밤에는 머리에 헤드랜턴을 달고, 먹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쓰레기통에서 꺼낸 빵을 맛보기도 한다.

“어느 슈퍼마켓에서는 그날 만든 빵을 포장 그대로 버리고, 농장에서는 껍질에 흠집이 났다고 바나나를 박스째 버리고, 대형마트가 정한 규격보다 크다고 버려지는 채소도 있고….”

그의 활동이 호응을 얻으면서 호주를 넘어 뉴질랜드와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같은 음식 나눔 시스템을 전파했다. 음식물 쓰레기가 메탄가스를 배출해 기후변화 같은 환경 문제까지 일으킨다는 데 생각이 닿으면서 2017년엔 유엔환경계획과 함께 음식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THINK, EAT, SAVE’ 캠페인을 벌였다. 같은 해 저소득층이 필요한 식품을 직접 가져갈 수 있는 ‘오즈 하베스트 마켓’도 열었다. 모든 상품이 무료로, 계산대도 경비원도 없는 기상천외한 슈퍼마켓이다. 또 이탈리아의 스타 셰프 마시모 보투라와 손잡고 기증받은 재료로 공짜로 요리를 만들어 내놓는 레스토랑을 내년 오픈 목표로 추진 중이다.

“식당을 운영할 건물을 사주겠다고 나선 독지가가 있어요. 좋은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좋은 일들이 일어나요. 음식을 받는 분들도 행복해하지만,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행복해하고, 기부자들은 선행을 한다는 생각에 행복해합니다. 저도 뜻을 같이하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서 공허했던 부분이 채워졌고, 삶이 훨씬 풍요로워졌어요. 매일 아침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을 뜹니다.”

그런데 이 ‘프로 푸드 파이터’에게 한국의 식탁은 어떻게 비쳤을까.

“김치랑 밑반찬 가짓수가 많던데, 밑반찬 양을 처음엔 아주 조금만 내고, 부족하면 더 덜어먹는 게 어떨까요. 꼭 필요한 식료품만 사는 것도 중요해요. 음식물 쓰레기의 절반은 가정에서 나옵니다. 통계상으로 식료품 장바구니 다섯 개 중 하나가 쓰레기로 버려지는데,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 가게 되면 아무래도 잔뜩 사서 버리는 게 많아지죠. 꼭 필요한 것만 적게 사고, 남은 식품은 바로 냉동시켰다가 해동시켜 다시 먹고요.”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명절답게 즐거운 마음으로 양껏 음식을 먹는 푸드 파이터가 되는 사람도, 되레 쌓이는 명절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나마 풀기 위해 푸드 파이터로 변신하는 이도 있으리라. 어느 쪽이 되든 간에, 마음 한쪽에서는 호주의 푸드 파이터 할머니의 당부를 잊지 말아주시기를.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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