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낳고 숨이 헉헉… 아이들 대학갈때까진 살고 싶어요”

국민일보

“둘째 낳고 숨이 헉헉… 아이들 대학갈때까진 살고 싶어요”

의사도 환자도 낯선병 ‘폐동맥고혈압’

입력 2019-09-16 21:52 수정 2019-09-17 00:19
유전성 폐동맥고혈압을 앓고 있는 여성이 최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해 폐동맥고혈압 환자들의 고충을 얘기하고 있다. 대한폐동맥고혈압연구회 제공

7세와 8세 두 딸을 둔 이모(39·여)씨는 5년 전 ‘폐동맥고혈압’이란 생소한 병을 진단받았다.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계단과 언덕을 오르는데 숨이 차고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겉으론 멀쩡하지만 아이를 업어주거나 쪼그려앉는 것 조차 힘들다. 평지에서 조금씩 걷는 정도만 가능하다. 그녀의 아버지도 같은 병을 앓다 3년 전 60대 후반에 세상을 떴다. 이씨는 “아버지는 비싼 약값 때문에 치료에 별 도움되지 않는 약만 드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씨는 현재 희귀·난치성질환자로 분류돼 약값의 10%(건강보험 산정특례)만 내고 있는데, 그래도 한 달에 50만원씩, 1년에 600만원이나 든다. 경제활동을 전혀 못하고 남편 월급만으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약값이 부담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폐동맥고혈압에 가장 효과적인 약은 아직 국내에 허가돼 있지 않다. 언젠가 들어온다 하더라도 1년 약값으로 2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는 소식에 기대와 한숨이 교차한다. 이씨는 무엇보다 “아이들을 남겨두고 일찍 떠나는 상황이 올까 두렵다”고 했다. 국내 폐동맥고혈압 환자의 평균 수명은 10년 정도. 이씨는 “벌써 5년 앓았고 우리나라에 허가된 가장 좋은 약을 먹어도 살 수 있는 날이 5년 밖에 남지 않았다”며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대학가려면 앞으로 12년 남았는데, 그때까지는 살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치명적 폐동맥고혈압 조기 발견 및 전문 치료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해 절절한 사연을 눈물로 호소했다.

이씨가 앓고있는 폐동맥고혈압은 환자는 물론, 의사에게도 낯선 병이다. 흔히 알려진 고혈압은 심장에서 온 몸으로 피가 뿜어져 나가는 혈관 압력이 상승(140/90㎜Hg 이상)해 발생한다. 반면 폐동맥고혈압은 심장에서 폐로 연결된 폐동맥의 압력이 올라 문제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호흡곤란, 만성피로, 부종, 어지럼증을 겪게 된다.


폐동맥은 혈압이 20㎜Hg를 넘으면 고혈압이며 정상은 15㎜Hg 미만이다. 폐동맥고혈압은 세계보건기구(WHO)가 분류한 폐고혈압(1~5군) 가운데 1군에 해당되는 유형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한다. 국내 등록 환자는 1500명 가량이다. 하지만 병명을 모른 채 살아가는 숨겨진 환자들이 훨씬 더 많고 이들은 4500~6000명으로 추정된다. 40대 중·후반 여성이 전체 환자의 약 80%를 차지한다. 20%는 유전성을 보이는데, 이 경우 가족의 60~80%가 잠재적 환자다.

가천대 길병원 심장내과 정욱진 교수는 16일 “한 가정의 엄마, 아내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숨차 하다가 죽어가는 병”이라며 “1995년 첫 치료제가 나오기 전에는 대부분 이유도 모른 채 숨졌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또 “흔히 볼 수 있는 병이 아니어서 심장내과, 호흡기내과, 류머티스내과, 소아심장과 등 4개 진료과 의사를 제외한 다른 의사들은 잘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런 탓에 조기 진단이 늦고 생존율 또한 낮다. 대한폐동맥고혈압연구회 조사에 따르면 최종 진단까지 약 1년 반이나 걸리고 확진 후 평균 생존율은 2.8년(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던 시기 기준)에 불과했다. 증상이 빈혈이나 심장질환, 폐질환과 비슷해 빠르고 정확한 진단에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환자와 1차 진료 의사 모두 의심하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폐동맥고혈압 환자의 절반은 돌연사하고 나머지는 우심부전(오른쪽 심장기능 이상)으로 사망했다.


폐동맥고혈압은 조기 진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엔 다양한 치료제 개발로 일찍 발견된 환자의 평균 생존율이 3배 넘게 증가했고 여러 약제 병용 요법으로 기대 생존율은 7.6년까지 늘었다. 전문가들은 올바른 치료를 받는다면 기대 생존율이 10년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일본 영국 호주 등 해외 국가들에 비해 국내 폐동맥고혈압 환자 관리와 지원체계, 전문 치료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관심 및 대책이 매우 미흡하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 폐동맥고혈압 환자의 3년 생존율이 지난 20년간 50%(1999년 46%→2018년 95%) 증가했다. 10년 생존율도 95%대를 유지하고 있다. 98년부터 정부 연구비 지원으로 환자등록사업이 시작되고 국가 보조금 지급, 전문치료센터 운영을 통해 효과적인 치료시스템을 구축한 덕분이었다. 또 99년부터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치료약인 ‘에포프로스테놀’을 비롯한 다양한 약제를 도입해 환자들의 병용을 적극 권장했다.

반면 한국은 2008~2011년 민간 주도로 시행된 1차 환자등록사업 이후 지난해에서야 질병관리본부가 극히 일부의 특발성 환자에 한해 등록사업을 시작했다. 전문치료 기관도 별도로 없으며 효과적 치료 약제인 에포프로스테놀은 국내에 도입도 안돼 있다. 폐동맥고혈압 주요 약제 10종 가운데 7종만 국내에 들어와 있어 병용 치료에도 한계가 있다.

국내 폐동맥고혈압 환자의 3년 생존율은 56%로 일본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선진국 평균 3년 생존율(85%)에도 훨씬 못 미친다.

전문가와 환자, 가족들은 미허가 약의 신속한 도입과 건강보험 급여 등재, 치료약의 병용 요법 확대, 환자등록 플랫폼 구축 지원, 전문치료센터 지정 등을 촉구하고 있다.

치료제 에포프로스테놀의 경우 해당 제약사가 조만간 국내 도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욱진 교수는 “하지만 희귀 의약품 지정과 허가, 약가 산정과 급여 등재 등에 거의 2년 걸린다”면서 “하루가 급한 환자들의 신속한 신약 접근을 위해 ‘패스트 트랙(fast track)’을 통한 허가기간 단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도 “폐동맥고혈압 치료제 허가가 우선 순위가 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문치료센터 지정과 관련해선, 기존 권역별 희귀질환센터와는 별도로 설립돼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희귀질환이지만 유전성이 80%인 일반 희귀질환과는 다른 진단 및 치료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 또 소아청소년과 의사 주도로 운영되는 희귀질환센터와 달리 폐동맥고혈압은 4개 진료과의 협진이 필수이고 전문 의료진이 꼭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울대어린이병원 김기범 교수는 “호주는 인정받은 폐동맥고혈압 전문센터만 6곳이 있고 영국은 유럽 최대 전문치료기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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