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칼럼] 믿을 수 있는 나라인가

국민일보

[박형준 칼럼] 믿을 수 있는 나라인가

입력 2019-09-17 04:01

조국 지키기는 사회적 자본인 신뢰의 파괴로 이어져…
신뢰는 책임을 먹고 자라는데 거짓말에도 책임을 지지 않아
‘이게 나라냐’로 집권했던 이들에게서 생각과 말과 느낌과 행동의 일관성을 찾을 수 없어


지난 한 달 반 한 사람의 장관 임명 여부로 온 나라가 불덩이가 됐다. 그동안 밝혀진 조국 일가의 특혜와 특권은 국민들의 마음을 할퀴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심사는 편치 않을 것이다. 추석이 끝났지만 조국 정국은 시즌 2로 다시 시작됐다. 정치 드라마의 흥행성을 보증하는 요소들은 더 늘어났다. 조국 윤석열 유시민 등 출연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거니와 여야 대결에 정권과 검찰의 대결이 중첩되면서 국민들의 관심도 줄어들지 않는다. 어쨌든 공리주의나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면 먹고사는 문제도 아닌 장관 임명 문제로 이리 시끄러운 것은 가성비가 참 낮은 일이다. 더구나 안팎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이 시점에 말이다. 여당이 ‘블랙홀’에서 나오자고 선창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조국 지키기’의 정치적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의 본질적 문제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신뢰의 문제다.

대통령은 의혹만으로 장관을 임명하지 않는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의혹 때문에 국민들이 등을 돌려 사퇴한 선례는 차고 넘친다. 문제의 핵심은 의혹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청문회에서 증언한 발언이 이미 거짓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여럿이다. 레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사노맹의 강령을 만들었던 사람이 사노맹 이념을 경제민주화를 위한 것이어서 헌법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궤변으로 자신의 양심마저 돌려 세웠다. 정통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했던 사노맹의 활동에 대해 필자를 비롯해 아는 사람이 숱한데 이렇게 두루뭉술 넘어갈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참 허술한 나라다.

차라리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후에 오류를 깨닫고 생각을 바꿨다고 했으면 될 일을 ‘자신은 무오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짓말을 선택했다. 사모펀드 운용보고서를 흔들며 블라인드 펀드라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지만 그 보고서는 청문회용으로 급조된 것임이 드러났다. 딸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출입에 친구들과 우르르 들어가 방문 기록이 없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들의 자녀가 스쳐 간 대학들은 논문 제1저자와 급조 인턴증명서, 장학금 세례 등 한결같이 자녀들에게 특혜를 주었는데 자신들은 모르고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준 일이라 강변한다.

공직자는 거짓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우선이고 탈법과 위법에 대한 책임은 그다음이다. 불행하게도 대통령은 청문회에서 거짓말한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것이 때린 것은 대한민국의 사회적 자본인 신뢰다.

대한민국은 상대적 저신뢰 국가다. 최근 연구로 보아도 세계 20위권 밖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서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특히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낮다. 사회적 자본인 신뢰가 낮으면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도도 떨어진다. 대한민국의 제도와 시스템은 신뢰 기반을 착실히 확장해 왔다. 문제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 특히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행동과 행태가 믿음을 못 줘 신뢰지수는 개선되지 못했다. 조국 사태도 딱 여기에 걸린다. 이 경우 심각한 흠결이 있어도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신뢰는 책임을 먹고 자란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은 공평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추석 메시지를 내놓았다. 공평이란 말은 페어플레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법무부는 검찰의 수사권에 손을 대려는 꼼수를 시도하고, 신임 장관은 검찰총장의 당연한 권한인 사무국장 임명 보류 등 인사권을 활용해 검찰을 흔든다. 나아가 몇 년 전 불행히 숨진 평검사의 묘를 찾아가 검사들에게 인사와 승진을 생각하라는 이벤트도 벌인다.

리더십 이론가 랜스 세크레턴은 “진정성이란 머리와 입과 마음과 발, 즉 생각과 말과 느낌과 행동을 일관되게 정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집권세력에게는 이 일관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른바 적폐수사 과정에서 전임 대통령들의 가족과 주변을 그토록 들쑤셨던 사람들이 ‘가족 인질극’ 운운하면서 고매한 인권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온갖 가짜뉴스와 결합한 피의사실공표로 정치적 재미를 보았던 사람들이 검찰의 입을 아예 틀어막으려 한다. 피의사실공표로 인한 인권 침해의 폐해는 교정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얼굴에 붙은 모기 잡으려다 제 빰 때리는 꼴이다. 더구나 ‘지난여름 당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국민들이 뻔히 알고 있는데 조국 보호를 위해 검찰을 압박하는 행동에서 어떤 진정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공자는 나라에는 군대와 식량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을 역설했다. 이는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이고 이 주인에게 믿음을 줘야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음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정권은 ‘이게 나라냐?’를 외치면서 집권했다. 그런데 지금 이 정권에게 국민들이 묻고 있다. 이게 믿을 수 있는 나라인가?

박형준 동아대 교수·전 국회사무총장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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