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황교익] 보수 꼰대의 운명

국민일보

[너섬情談-황교익] 보수 꼰대의 운명

나이 들면 대부분 안정을 추구하게 돼… 그렇다고 내 말대로 살지 말고 나가 싸워 이기기를

입력 2019-09-18 04:02

“월급쟁이가 최고지.” 어머니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버지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였고,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많이 벌 때도 있었지만 돈이 말라 쩔쩔맬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남에게 신세 지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였다. 공장에 돈이 안 돌면 돈을 빌리는 일을 어머니가 하였다. 안정된 직장에서 또박또박 월급 받는 가장을 두지 못한 것이 어머니의 한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월급쟁이가 최고지”라는 말을 내내 들어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 행복한 줄 알았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최고의 월급쟁이는 공무원과 교사와 대기업 직원 등이었다. 내 어머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안정된 삶을 평생토록 유지해주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거의 모든 어머니가 자식에게 바라는 꿈이었다. 아버지들도 어머니들의 꿈에 반대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어른들은 어린 우리들에게 다들 이렇게 말하였다. “월급쟁이가 최고지.”

고등학생일 때에 인근 도시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취업 10계명’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나는 취업 10계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몸을 떨었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삶의 방식이었다. 안정된 삶을 버리라니,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이 도전적인 삶에 몸을 맡겨볼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젊었고 두려움이 없었다. 내 어버이들이 만든 ‘보수 꼰대’의 세상을 거부하는 ‘진보 청년’의 태세로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였다.

현재까지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 취업 10계명에 맞추어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내 뇌리에서 취업 10계명을 지운 적이 없다. 안정된 삶이 눈앞에 다가오면 부러 그 삶을 흔들기 위해 취업 10계명을 꺼내어 든다.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그 길이 혹 비겁과 이기의 길은 아닌지 취업 10계명 앞에서 점검을 한다.

취업 10계명을 읽으며 몸을 떨었던 고등학생은 이제 그 당시의 어버이들만큼 늙었다. 그때의 나 같은 내 아이들과 함께 내 아이들의 취업과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취업 10계명이 내 뇌리에 새겨져 있든 말든 아비로서의 본능이 당연히 작동한다. “그 대학에서 그거 전공하면 어디에 취직을 하는데”가 입시를 앞둔 자식들에게 던지는 첫 질문이다. 내 어버이들이 나에게 하였던 “월급쟁이가 최고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말이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안정 추구 세력이 된다. 특히 자식들 앞에서는 보수 꼰대가 된다. 자신의 새끼들이 고생하지 않기 바라는 것은 인간 동물의 본능이다. 취업 10계명을 읽어주며 “너는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하고 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 자식이 내 자식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간됨의 자존심은 몸에다 장착하고 살아야 한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다고 비겁과 이기의 길을 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수 꼰대는 거의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운명은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 운명 앞에서 자기 부정의 비극적 용기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진보 청년들이 자기 세상을 산다.

“너희가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월급쟁이가 최고일 수 있다. 내 어버이들이 그랬듯이 너희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 말대로 살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반대하는 길이 맞을 수 있다. 나는 취업 10계명 중에서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나는 그렇게 살았다. 이제 너희 차례이다. 나와 싸워서 부디 이겨라.” 보수 꼰대는 지기 위해 존재한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