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절망에 빠졌을 때…

국민일보

병실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절망에 빠졌을 때…

안호성 목사의 사자처럼 담대하라 <4>

입력 2019-09-1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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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호성 울산온양순복음교회 목사(오른쪽 두 번째)가 2002년 11월 일본 오사카시립대 축제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한국 문화를 알리고 있다.

2001년 3월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들이 찾아오셔서 내 몰골을 보시더니 깜짝 놀라셨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주셨다. “오 주님, 이 아들을 살려주시고 치료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펑펑 우시는데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기도에 확신도 없어 보였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고 목사님마저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기도를 했다. 정말 답이 나오지 않는 삶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절망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병실로 들어오시더니 갑자기 이불을 확 걷어붙였다. 그리고 난데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다 죽어가는 아들 사진을 찍어대는 아버지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아, 내가 살 가망이 없다는 걸 파악하시고 아버지가 정신까지 놓으셨구나.’

아버지는 사진 촬영을 마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성아, 너 안 죽는다. 넌 반드시 산다. 얼른 살아나서 이것 가지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 다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그때 왜 기념 촬영을 하시고 나서 신유의 선포를 하셨는지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셨던 선언은 정말 현실이 됐다. 기적적으로 고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악취도 나지 않았다. 분비물이 노란색에서 맑고 투명한 액체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염증은 줄어들었다. 몸이 스스로 치유되는 속도를 느낄 정도였다.

의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야, 이거 정말 기적이네.” “선생님, 제가 지금 낫고 있는 게 맞죠.” “낫는 정도가 아니라 회복 속도가 엄청 빨라요.”

튜브가 꽂힌 옆구리 구멍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튜브에 살이 달라붙는 것을 막으려고 의사가 좌우로 무자비하게 흔들어댔다. “아아악, 사람 죽네!” 사람 죽는다는 소리도 살만할 때 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살만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진짜 죽을 사람은 죽겠다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다.

옆구리에 박힌 튜브를 빼는 작업은 정말 신음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아침에 의사가 왔다. “안호성씨, 오늘부터 튜브를 빼겠습니다. 하루에 빼는 것은 아니고요. 조금씩 뺍니다.” 1m 50㎝나 되는 튜브를 옆구리에서 뺀다고 했다. “자 이제 뺍니다.” “으악.” 의사가 순식간에 튜브를 잡아당기는데 옆구리가 통째로 잘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창자가 몽땅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날부터 하루 2~3㎝씩 튜브를 뽑아냈다. 아침마다 쇼크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1개월 넘게 튜브를 뽑아냈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처음엔 의사 선생님이 대장암 말기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장결핵이었다. 연세가 지긋한 의사분이었는데 장결핵 환자는 30년 만에 처음 봤다고 했다.

“요즘엔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병인데 말이죠. 거 참.” “그럼 다 나은 것인가요.”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잘만 하면 완치됩니다.”

튜브를 다 뽑고 며칠 뒤 퇴원했다. 악몽 같았던 첫 투병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주님을 떠나 멀리 살아왔던 탕자 같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

유학 생활도 끝이 났고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곧바로 학교에 복학했다. 짧지만 유학 경험이 있다 보니 청주대 유학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주로 유학상담을 하고 관련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몸도 낫고 생활도 안정이 되자 ‘주님, 살려만 주신다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했던 고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달랐다. 서원은 뒤로 한 채 두 번째 유학지인 일본으로 향했다.

누나가 마침 일본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매형의 할머니가 일본에 맨션을 갖고 있어서 주거비 걱정 없이 유학 생활을 했다. 일본 유학은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월세를 내지 않으니 그 돈으로 어려운 유학생을 도와주고 전도도 했다. 일본에 파견 나와 있던 대기업 간부의 자녀 과외도 했다. 오사카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인생의 또 다른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호성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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