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림의 명화로 여는 성경 묵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국민일보

[전창림의 명화로 여는 성경 묵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헨드릭 테르 브루겐의 ‘장자권을 파는 에서’

입력 2019-09-20 19:33 수정 2019-09-20 19:36
  • 미션라이프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1627년 작,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보메미사미술관 소장

밭에서 일하다 허기져 돌아온 에서는 집이 가까워지자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틀림없이 맛있는 팥죽 냄새다. 바로 달려간 부엌, 엄마와 야곱 앞엔 팥죽이 있다. 성급히 그릇에 손을 대니 야곱이 막아선다. 안돼. 아버지도 아직 안 드신 거야. 에서는 참을 수 없었다. 나 좀 먹게 해줘. 그렇다면 형의 장자권을 내게 줘. 그러면 이 팥죽을 줄게. 그래, 그러지 뭐, 어차피 그건 말뿐인 건데. 레몬과 떡도 있으니 정말 맛있을 거야.

화면의 오른쪽에 밭에서 막 돌아온 에서가 서 있고, 왼쪽에 앉아서 팥죽 그릇을 잡은 사람이 야곱이다. 탁자에는 레몬이 담긴 그릇과 마늘이 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 이 거래의 중요한 증인인 엄마 리브가가 떡을 들고 서 있는데 에서와 대척되는 위치다. 야곱의 뒤 그늘에는 아버지 이삭도 보인다. 이 거래는 이삭도 하나님과 함께 이미 아는 것 같다.(창 25:23)

이삭은 훗날 임종이 가까워오자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줄 테니 사냥을 해 맛있는 고기를 가져오라고 했다. 이 말을 엿들은 리브가가 먼저 양고기를 준비하고 야곱의 팔에 염소 가죽을 둘려서 몸에 털이 많은 에서인 것처럼 꾸몄다. 눈이 어두운 이삭에게 음식을 가져가게 해 에서에게 돌아갈 장자권을 가로챘다. 그리고 이스라엘 12 민족의 선조가 됐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야곱처럼 속임수를 쓴 자에게 장자권과 같은 복을 주셨을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다. 야곱은 평생 에서의 복수가 두려워 잠도 제대로 못 이루며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갈비뼈가 부러져 장애인이 되는 곤궁에 처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이나 머슴살이를 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욕심 많고 이기적이며 사기성도 있는 야곱을 고난으로 연단시켜 결국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행위의 선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하나님은 이미 두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을 택하셨다.(창 25:23)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고(창 25:33) 이방인 여성과 결혼(창 26:34)하는 등 처음부터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기에 앞서 그에게 길고 힘겨운 고난을 내리셨다. 고난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고난은 연단하고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역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과정이다. 고난은 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기로 선택하셨다는 은혜를 깨닫는 과정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11)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 29~34)

헨드릭 테르 브루겐
(Hendrick Ter Brugghen, 1588~1629)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테르 브루겐은 로마에서 10년을 공부하고 돌아와 주로 종교화와 풍속화를 그렸다. 부분조명 기법의 대가 카라바조의 명암법에 크게 영향받았다. ‘장자권을 파는 에서’에서도 촛불에 비친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그의 작품들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부분조명의 극적인 화면에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조화시킨 걸작들로 재평가 받았다.

<홍익대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