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10) “주님 저를 쓰소서”… 결혼하던 해 목사안수 받아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박종순 (10) “주님 저를 쓰소서”… 결혼하던 해 목사안수 받아

영락교회 부목사 청빙 받아… 한경직 목사 그늘에서 사역하며 목회철학 가까이서 지켜봐

입력 2019-10-0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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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목사(오른쪽)가 1993~94년쯤 남한산성 우거처에서 한경직 목사를 만나 대화하고 있다.

1966년은 큰 의미가 있는 해였다. 결혼을 했고 목사안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삶의 변곡점이 두 차례나 있었다. 당시 충신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서울노회 소속이었다. 지금은 서울서노회 소속 교회다. 나는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늘 목사가 되라고 하셨던 어머니께 감사했다. 내게 목사의 씨앗을 심어준 아버지 박화선 전도사 생각도 많이 났다. 아버지 얼굴은 당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으로 어렴풋이 추억할 뿐이다. 아버지가 목사가 된 나를 보고 기뻐하실 것만 같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교회를 섬기셨던 분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되리라.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기도하셨다. “주님, 박 목사가 이제 목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바로 가게 해 주세요. 바른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 이 기도가 목사로 출발하는 내게 준 어머니의 유일한 선물이었다. 다짐했다. 목회도, 인생도, 신학도 정도를 걷겠노라고 말이다. 훗날 내가 ‘바른신학, 바른목회’를 기치로 내건 것도 이때의 다짐 덕분이었다. 좌고우면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현실은 변한 게 없었다. 충신교회는 여전히 가난했다. 부목사가 됐지만, 대우는 전도사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가난한 일상이 반복됐다.

하루는 새벽기도 설교를 마치고 단에서 내려왔는데 새벽기도회에 가끔 나오던 영락교회 장로님이 교회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박 목사님, 교회 한번 옮겨 보시면 어떨까요?” 영락교회 교육부에서 부목사를 청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교구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영락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님이 계시질 않는가. 그 그늘이라면 어떤 직책을 맡겨 주셔도 좋았다.

67년부터 69년까지 영락교회에서 사역했다. 한 목사님의 그늘은 정말 좋았다. 삶이 목회였고 신학이셨던 분이었다. 3년 동안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 나의 안테나는 늘 한 목사님을 향해 있었다. 그분의 목회철학을 가까이에서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겸손하신 분이었다. 젊은 목사들에게도 함부로 말씀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항상 한국교회 걱정을 하셨다. ‘신학은 시계추와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그 축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진보도 보수도 가능하나 신학의 추가 흔들려서는 안 되다는 경고였다. 평범한 진리였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고조되던 시기에 큰 가르침이었다. 신학적 입장이 달랐던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이유도 됐다.

한 목사님은 목회를 네 가지 분야로 나누셨다. 교육, 선교, 봉사, 행정관리였다. 각 분야 모두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다. 각별히 살피셨고 균등하게 관심을 가지셨다. 그런 배려가 영락교회를 세운 힘이 아니었을까.

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뒤 남한산성에 계실 때도 나는 자주 찾아뵀다. 목사님 앞에 서면 나는 어린아이 같았고 그분은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내가 과연 사역을 잘하고 있는가. 그분 앞에 서서 나의 자리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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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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