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아빠가 건넨 ‘감기약’ 먹은 아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국민일보

[이슈&탐사] 아빠가 건넨 ‘감기약’ 먹은 아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한국사회 잔혹극 ‘살해 후 자살’

입력 2019-10-07 21:18 수정 2019-10-08 09:35


그 날은 나흘 만에 아빠를 만나는 날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초등학생인 세 딸은 엄마와 친척 집에서 머물고 있다가 아빠가 데리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평소 갖고 싶어 하던 포켓몬스터 인형을 사줬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선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1시간을 놀았다. 평소와 다름없던 하루였다.

평범했던 순간들로 채워졌던 그날은 “감기약을 먹자”며 아빠가 건넨 알약을 먹은 뒤 끝이 났다. 아빠가 준 건 수면제였고, 세 딸은 곧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 목이 졸려 숨진 것이다.

“애들은 방 안에 가지런히 누워있었고, 아내도 안방에서 죽어있었다. 아빠도 죽으려고 자해한 흔적으로 혈흔이 어지러웠던 것을 빼면 그냥 평범한 일반 가정집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현장을 찾았던 경찰은 7일 이같이 회상하며 말했다. 이웃들은 그가 “자상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연이어 찾아오면서 극단의 상황에 몰렸던 아빠는 그날 오전 아내에게 죽음을 이야기 했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동안 이미 결심이 끝나 있었고, 수면제도 미리 처방받았었다. 아빠는 “아이들 몸에 상처가 나지 않게 잠을 재워 보내기로 했었다”고 말했다. 법원은 “일방적인 판단만으로 아무런 죄도 없는 자녀들의 소중한 생명을 빼앗았다”고 판시했다.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 피해자인 아이들은 이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대부분 느닷없이 죽음을 마주했다. 죽음 직전의 장면을 추적하다 보면 그저 보통의 날을 기대하고 있었던 티 없는 아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장난감을 건네던 아빠의 손, 자신을 달래던 엄마의 품에서 숨이 끊기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지난달 17일 만난 수도권의 한 경찰관은 유치원에 가고 싶어 했다는 남매 살인 사건을 잊지 못했다.

“CCTV 속 아이들은 해질 무렵 해맑은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채로 천진난만하게 장난치며 뛰어다녔다.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정말 불쌍해서 눈물이 났었다.”

남매는 그날도 투정 없이 유치원 대신 집 근처 외할머니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선 남편과의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우울증을 앓다가 극단적 선택을 결심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나라로 함께 데려가는 게 아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복용 용량을 절대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의사가 경고했던 약물을 아이들에게 먹였다. 아이들은 약물 중독으로 숨졌는데 경찰이 갔을 땐 약이 써 토한 흔적이 발견됐다. 그녀도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남편이 발견해 죽음은 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근처 외할머니댁에 놀러가는 시간을 제외하곤 늘 엄마와 하루 종일 함께였다고 한다. 경찰은 “엄마를 무척 따랐던 아이들”이라고 했다. 사건 전날 엄마가 마트에서 사준 과자 하나에도 행복해하던 아이들이었다.

사건 기록이나 판결문에 나온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에선 ‘죽음’의 흔적이 없었다.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미취학 아동인 경우가 많았고, 부모로부터 ‘죽음’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받은 경우도 없었다. 아이들의 ‘동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명백한 살인이었던 것이다.

반면 부모들은 아이와의 마지막 날을 계획했다. 주식투자 실패로 삶의 의욕을 잃은 아빠는 아이들이 자신을 ‘좋은 아빠’로 기억하는 지금의 시간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뒤 휴대전화를 초기화하고 가입했던 인터넷 사이트를 탈퇴했다. 유서를 쓴 뒤 아내, 아이들과 가족여행을 떠났다. 아빠는 여행지에서 아이들을 살해하고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다. 그러나 여행으로 들뜬 하루를 보내던 아이들이 쉽게 잠들지 않아 범행에 실패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아빠는 다시 살인을 결심했고 수면제를 건넨 뒤 가족이 모두 죽는 비극을 스스로 만들었다.

아이의 일기장엔 ‘아빠 최고’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고 한다. 집 앞에서 함께 줄넘기를 했고, 자주 여행 다니며 사진을 찍어줬던 다정한 모습이 그대로 기록돼 있었다. 이웃들도 그를 ‘다정한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유나 김판 기자 spr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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