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왜곡된 가족주의로 아이 목숨 박탈” 엄마는 매일 뉘우쳤다

국민일보

[이슈&탐사] “왜곡된 가족주의로 아이 목숨 박탈” 엄마는 매일 뉘우쳤다

한국사회 잔혹극 ‘살해 후 자살’ ⑤

입력 2019-10-13 18:37

“자식을 소유물로 여긴 왜곡된 가족주의로 생사권을 남용했습니다. 제가 세 아이를 낳아 길렀지만 이 아이들 역시 어른과 동등한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모가 책임감을 갖고 생명의 소중함을 크게 느꼈어야 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 살고 싶었던 날들과 살아남은 두 아이를 위해 삶의 의지를 다지며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소중한 아이들의 미래를 가벼이 여긴 것 정말 잘못했습니다.”

항소심 선고 마지막 공판에 피의자로 나온 엄마의 목소리는 떨렸다. 수의를 입은 아빠는 옆에서 눈물 젖은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부부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시도했었다. 이때 아이 한 명이 죽어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1심에서 각각 징역 3년과 5년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한 달 후 엄마 A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고 풀려났다. 가족이 같이 죽을 계획을 주도했던 아빠는 1심 그대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자체는 참혹했다. 부부는 빚에 몰려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들도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결심했었다. 추위가 매서웠던 겨울 어느 날, 미리 범행 도구를 준비해 놓고는 세 아이와 외식을 하고 선물도 사줬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재우고 번개탄을 피웠는데 막내가 깨면서 시도에 그쳤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A씨는 아이의 상태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인공호흡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아이 한 명은 깨어나지 못했다.

‘부부의 죗값이 가볍지 않다’는 건 항소심 재판부에서도 일치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부모가 모두 감옥에 가면 생존한 두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면 답을 낼 수 없었다. 비록 늦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가정에 ‘개입’하기로 했다.

개입의 시작은 삶의 의지를 스스로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 항소심 첫 공판일 A씨에게 ‘직권 보석’이라는 깜짝 제안을 한 건 이런 배경에서였다. 보석은 조건을 걸고 구속된 피고인을 임시로 풀어주는 제도다. 보통은 보증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재판부는 빚 때문에 극단에 몰렸던 A씨를 보증금 없이 석방했다.

대신 숙제를 줬다. 재판부는 비극의 발단이었던 채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구직을 위한 계획도 세워 보고하라고 했다. A씨 부부는 빚으로 힘겨워하던 상황에서 구체적인 회생 방법 등을 몰랐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A씨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되 범행이 일어났던 야간에는 같은 집에 머물 수 없게 했다. 일종의 분리 조치다. 재판부는 A씨에게 매일 일과를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토록 했다.

석방된 A씨는 남편의 채무에 대한 연대보증 여부 등을 알아보고 구청에 가서 일거리도 찾아봤다. 사건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아이를 매일 마사지해주며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자신의 행적을 모두 재판부에 알렸다. 한 달의 시험기간을 검토한 뒤 재판부는 1주일에 이틀은 아이들과 밤에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조건을 완화해 줬다. 그리고 최종 선고가 난 뒤 그녀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살해 후 자살 사건을 한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국가나 사회가 개입할 경우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실험한 것이다.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뒤 홀로 남겨진 아이들을 위한 관련 기관들의 개입이 시작됐다. 관할 경찰과 검찰이 지역 내 범죄 피해자 관련 기관을 모아 실무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강력사건 피해자가 된데다 마음의 상처를 돌봐줄 부모마저 잃고 보호시설에서 지내게 된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법률구조공단과 지역 구청, 아동보호전문기관 등이 함께 모여 남은 두 아이의 회복을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관련 기관 관계자는 “형사책임 문제뿐만 아니라 피해자 가구 지원 등이 필요해 유관 기관 회의를 열었다”고 했다.

구청은 아이들을 국민기초생활 수급자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했다. 보호시설에서 나온 아이들이 머물던 친척집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상황을 점검했다. A씨가 집행유예를 받고 출소한 이후에는 A씨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A씨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지만 사건 가해자이기 때문에 치료 지원을 받는 게 쉽지 않았다.

집안의 가장이 수감된 터라 생계도 문제였다. 구청은 기존에 기초생활을 보장받던 자녀들에 엄마인 A씨를 가구원으로 추가해 A씨가 정신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보통 3인 가구 기준 지원되는 생계비는 112만원 수준이다. 구청 관계자는 “엄마가 지속적으로 치료받는 상태에서 근로활동을 할 수 없어 생활 안정을 위해 보장받을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지역 대학병원은 가정의 심리적 회복을 도왔다. 검찰의 의료지원 요청을 받은 병원은 아이들이 한 달에 3~4회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A씨도 풀려난 뒤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전문가들은 A씨 사례가 국가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봤다. 살해 후 자살 자체를 예방하는 게 가장 좋지만, 이미 시도가 이뤄졌다면 최대한 빨리 지원해야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진단이다. 살해 후 자살 위험이 감지되거나 시도가 이뤄졌을 때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지원해야 다시 가정이 위기에 빠지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정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비극은 언제든 재발될 우려가 있다.

배상훈 서울디지털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자살은 한번에 완수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미수에 그쳤을 때가 제일 위험하고 중요하다”며 “경찰, 검찰, 법원 단계에서 (어떻게 해야 가정이 회복될 수 있는지) 논의하는 과정이 전면적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A씨 부부 항소심 재판부도 “형사 절차에서는 무책임한 행동을 한 부모를 엄정 처벌해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살아난 자녀와 부모가 서로 화해하고 회복하는 과정도 동반돼야 한다”고 했다.

임주언 김판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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