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수 칼럼] 중도층의 재발견

국민일보

[신종수 칼럼] 중도층의 재발견

입력 2019-10-16 04:01

진영 싸움 벗어나 상식과 합리 따른 캐스팅보트 역할 주목
중도는 진보와 보수 중간 아닌 균형과 절충 찾아가는 과정
국정 운영과 정치도 마찬가지지지층 의존 말고 설득해야


조국 사태를 보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점은 검찰 개혁과 조국 수호를 같이 외치는 것이었다. 조국 사태의 본질은 고교생 딸의 의학논문 제1저자, 의학전문대학원 2차례 유급과 6차례 장학금 등에서 불거진 공정성 문제였다. 청년층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평소 공정과 정의를 강조해 온 조국에게 실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고 검찰 개혁을 찬성하는 사람 중에서도 조국이 다른 장관도 아니고 사법행정을 관할하는 법무부 장관을 맡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친문 성향 맘카페 여론조사에서 조국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한 예다. 이뿐만 아니라 조국 사태가 벌어진 이후 실시했던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한 번도 조국 반대가 찬성보다 적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진영 싸움이 되면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를 계기로 ‘검찰 개혁=조국 수호’ 등식이 만들어졌다. 할 말을 한 진중권 금태섭 박용진 김경률 등이 진영 내에서 집단 린치를 당하는 억압 구조도 생겼다. 조국을 수사하는 검찰을 쿠데타라고 공격하고 조국을 비호하는 궤변과 요설이 난무했다. 여권의 대선주자들마저 한마디씩 거들며 지지층의 눈도장을 받았다. 반면에 국정 농단과 탄핵을 부정하는 태극기부대가 공정을 외치는 역전 현상도 일어났다. 자유한국당에 강력한 대여 투쟁 명분과 정당성을 제공해 대규모 집회가 가능하게 됐다. 모두 여권이 조국을 수호하려 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사안별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경향이 강한 중도층은 이런 상황을 힘들어했다. 진영 싸움이 가열될수록 상당수의 중도층이 이탈했다. 중도층에 이어 단순 지지층마저 떨어져 나가 극렬 지지층만 남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치로 떨어졌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문 대통령보다 더 낮다. 한국당은 그동안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반사이익으로 지지율이 올랐다. 지금 총선이 치러졌다면 민주당은 틀림없이 졌을 것이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며 조국을 수호하려 했던 여권의 판단은 애초부터 틀렸다. 국민 다수의 의견을 수용하는 게 뭐가 끝이란 말인가. 핵심 지지층 결집 전략도 실패했다. 핵심 지지층만으로는 내년 총선에서 이길 수 없고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도 없다. 흑과 백으로 편을 갈라놓고 조국 수호는 우리 편, 반대는 저쪽 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비상식이다. 세상은 흑과 백만 있는 게 아니라 둘 사이에 회색을 포함해 다양한 컬러의 중간색들로 이뤄져 있다.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고 사안별로 옳고 그름, 상식과 비상식을 판단하는 중도층의 존재감이 이번에 확인됐다. 중도층은 두 진영으로 쪼개진 우리 사회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견고하게 30∼40%를 차지하고 있는 중도층은 좀처럼 조직화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양 극단의 정치가 이분법으로 다툴 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곤 한다. 각 진영의 패거리들이 몰려다니며 SNS에서 댓글을 달고 목소리를 높여도 주로 눈팅만 한다. 이들은 서초동과 광화문 모두를 갈 수도 있고 어느 곳도 가기 싫어할 수도 있다. 사실 이번에 관심을 끈 집단은 무조건 조국을 찬성한 진보나 조국에게 설령 별다른 문제가 없었어도 반대했을 보수가 아니다. 검찰 개혁에 찬성하면서도 조국에 반대한 중도, 중도 진보, 중도 보수다. 이들은 다중적이고 애매한 상황을 견디며 올바른 선택을 한다. 중도는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중간이 아니다. 복합적인 상황이지만 칼날 위에서 균형을 잡고 나아가듯이 극단적 판단을 멀리 하면서 절충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조국 사퇴 이후 어떻게 국정 운영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중도에게 다가가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지지층인 노동계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보다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지지층을 설득하지 않고 지지층에 얹혀가는 지도자는 올바른 지도자가 아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지지층만 생각하는 정치는 패거리 정치나 다름없다. 양당 독과점 체제에서 지지층에 기대는 정치는 당장은 쉽고 편하지만 확장성이 없다. 진영 논리에 갇혀 있지 않고 상식을 말하는 정치인도 많아지기를 바란다. 여야 관계도 변해야 한다. 여야는 서로 타도 대상이 아니라 손을 잡아야 할 파트너다. 검찰 개혁의 핵심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만 해도 여야 합의가 아니면 처리가 어렵다.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 공통분모를 찾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유권자들도 특정 정당이나 사람을 무조건 지지하기보다 사안별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누가 이편이냐 저편이냐고 묻거나, 색깔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할 경우 흑도 백도 아닌 고화질 총천연색이라고 당당히 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것은 기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다.

논설위원 jsshi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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