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진우] 광장의 두 얼굴

국민일보

[여의도포럼-이진우] 광장의 두 얼굴

입력 2019-10-17 04:02

광장은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 공간이어야…
기득권 세력이 이용하면 파시즘의 무대 돼
직접민주주의는 숙의와 토론 가능한 소규모 인구여야 가능
최선의 제도는 의회민주주의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로 수그러들진 모르지만, 광장의 분열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를 종식하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배양할 ‘광장민주주의’가 파당적 세몰이의 광장정치로 변질하였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2년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왜 사람들은 다시 광장으로 나가게 된 것인가. 주말마다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각각 경쟁적으로 벌어졌던 파당적 광장정치는 나라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두 광장 사이에는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거대한 갈등의 강이 흐른다.

우리가 광장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 모두가 단합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기도 하지만, 광장의 분열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로 국론이 분열된 것도 문제지만, 이 갈등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 조국 사태로 분명하게 드러난 광장의 두 얼굴을 직시하고 우리의 민주적 역량을 회복하는 것이 ‘조국 이후’의 정치적 과제가 될 것이다.

국민 여론이 양극단으로 나뉜 것을 보고 ‘국론분열’이 아니라던 문재인 대통령이 갈등을 야기해 송구하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광장에 대한 그의 인식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광장에서 보여준 국민의 민주적 역량과 참여 에너지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은 대통령의 입장은 간단하다. “대의정치가 충분히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들 때 국민이 직접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 행위로서 긍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심은 여기서 시작한다. 국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 정치의 공간이 의사당에서 광장으로 옮겨온 것인가? 아니면, 선출된 최고권력이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민과 직접 소통하기 때문에 광장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인가?

광장정치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광장민주주의의 맥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장의 두 얼굴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경제 성장의 이름으로 자행된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민주적 제도를 공고히 하는 민주화 과정에서 광장을 이상화하였다. 광장은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독재와 파시즘에 저항하는 민주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960년 4·19혁명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쳐 2016년 촛불 혁명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통치권력에 맞서 국민 합의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곳이 바로 광장이었다. 어떤 권력도 국민의 민주적 의지를 압살할 수 없다는 의식이 일깨워진 광장, 그곳이 바로 민주주의의 토대였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거대한 권력에 맞설 때 광장은 신성한 민주주의의 공간이 된다. 그렇지만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전시하고 확대하기 위해 광장을 이용하면 광장은 항상 파시즘의 무대가 되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권력을 연출하기 위해 수많은 군중을 동원한 곳도 바로 광장이었다. 이렇게 국민적 합의와 통합보다는 오로지 권력과 파당적 이익을 위해 군중이 동원되는 것은 광장정치다. 이처럼 광장은 한편으로는 파시즘적 광장정치와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문제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광장민주주의의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광장민주주의는 다양한 시민들의 평화적 토론과 숙의를 전제한다. 사람들은 직접민주주의의 광장 모델로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로마공화정의 포럼을 떠올린다. 고대 그리스의 광장 아고라(agora)는 실제로 폴리스의 심장이었다. 호메로스가 야만과 문명, 무법과 합법의 결정적 차이는 아고라라고 말할 정도로 광장은 민주적 정치의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황금기 아테네의 인구는 약 25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광장에서 열린 민회에 참석할 수 있는 시민이라고 해야 기껏 6000명 안팎이었다.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00만, 200만명의 군중이 쉽게 모이는 오늘날,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 국정을 토론 숙의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그리스 광장의 전제조건은 다원성이었다. 오늘날 시민의 다양한 의견을 제도적으로 반영하여 합의를 이끌어내는 최선의 제도는 의회민주주의다. 의회가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할 때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는 물론 이를 보완할 수 있다. 광장은 환경, 난민, 동성애, 기후변화 등 기존의 정치가 대변하지 못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이슈화하는 공간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통치 권력이 의회를 건너뛰어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의도로 광장을 이용하는 것은 결코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다. 의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광장정치가 등장한 것이 맞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누가 의회를 불구로 만드는가. 의회가 강화되어야 광장민주주의가 부활한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