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박재찬] 우편함의 독촉장

국민일보

[뉴스룸에서-박재찬] 우편함의 독촉장

입력 2019-10-21 04:03

일가족 4명이 한꺼번에 세상을 등졌다. 가장 A씨가 가족을 살해한 뒤, 자신마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이 사건을 다룬 기사들이 빼놓지 않은 내용이 있다. ‘우편함에는 저축은행의 대출상환 독촉장이 꽂혀 있었다.’ 1년 전쯤 타지에서 제주로 건너와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하니, ‘장사가 잘 안돼서 빚 갚기도 벅찼겠구나’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언론도 그런 정황을 감안해 ‘우편함의 독촉장’ 문장을 넣었을 것이다.

2금융권인 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렸다는 건 1금융권인 일반 은행에서 대출받는 게 여의치 않았다는 얘기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하는 이들은 이자가 무거워도 저축은행 문을 두드리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A씨처럼 저축은행으로부터 독촉장을 받게 되는 경우다. 대출금 연체자로 등록되는 순간, ‘채무변제 독촉장’이 배달된다. 이어 ‘변제 최고장’ ‘채무정리 최종촉구 통고서’ 등이 차례로 날아들면서 채권 추심 절차가 진행된다. 동시에 독촉 전화나 문자메시지도 많게는 하루에 수십통씩 쇄도한다. 채무자 소재를 파악한다며 자택이나 직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채무자 입장에선 죽고 싶을 만큼이나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집요하고 끈질긴 채권추심 절차는 모든 게 채권자 입장에서 이뤄진다. 채무자의 현재 상황은 어떤지, 빚 상환이 가능한 수준인지, 가능하다면 액수와 기간은 조정 가능한지 등의 상호 협의는 언감생심이다. ‘안갚는 이유가 뭐냐’는 추궁만 있지 ‘왜 못갚고 있는지’에 대한 참작은 찾아보기 힘들다.

A씨가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게 된 건 빚을 안 갚는 게 아니라 못 갚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 추궁하고 종용하고 협박도 한다. 이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를 우리는 뉴스에서 심심찮게 전해듣는다. 주요 범죄나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 사건들 속에서 채무 문제는 핵심 고리가 되고 있다.

채무변제에 대한 문제 의식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BC 594년 아테네의 집정관 솔론은 부채탕감을 골자로 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채무계약서를 모두 폐지하고 빚을 못 갚아 종살이로 전락한 ‘채무 노예’를 해방시켰다. 경제와 국방, 세무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채무 변제를 못해 발생하는 사회적 폐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솔론의 개혁으로 아테네는 안정을 되찾았다.

기독교를 비롯해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 받는 걸 금지하거나 제한해왔다. 이 같은 제도의 밑바닥에는 빚의 굴레가 인간다운 삶을 무너뜨린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20세기 들어 나타난 대량생산 체제는 대부·할부에 이어 신용대출 제도를 양산했다. 동시에 경기가 불황에 접어들면 채무 연체가 늘었고, 추심도 덩달아 증가했다. 이에 따른 범죄 등 해악이 급증하자 미국(1968) 영국(1974) 독일(2002) 호주(2009) 등은 저마다 채무자를 보호하는 내용의 ‘소비자신용법’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20여년 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개인 채무가 크게 늘었다. 2003년 카드사태 때는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급증했다. 불법 사금융이 판을 치자 대부업법(2002)이 마련되고, 폐지됐던 이자제한법도 부활(2007년)됐다. 10년 전쯤엔 불법 추심을 막기 위한 공정추심법도 만들어졌다. 정부는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소비자신용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금융 채무자는 약 1900만명이다. 이 가운데 90일 이상 대출금을 갚지 못한 개인 연체 채무자는 10%인 190만명 정도다. 이들 중엔 당장 빚 갚을 형편이 안되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 우편함에 꽂힌 채무변제 독촉장은 ‘제발 나 좀 살려 달라’는 구조 요청이나 마찬가지다. 연체 채무자의 상환능력 등 개별 사정을 배려한 소비자신용법 제정을 좀 더 서두르면 좋겠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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