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슬픈 민족 쿠르드족처럼 될 수는 없다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슬픈 민족 쿠르드족처럼 될 수는 없다

입력 2019-10-21 04:01

트럼프 철군 결정이 쿠르드족을 대량학살 위기에,
중동 정세를 불안에 몰아 넣어…
미국 이익 앞세운 대외정책의 결과
북핵도 미국 정치에 따라 판도 달라질 수 있어…
핵 개발 같은 강력한 지렛대가 외세에
휘둘리지 않게 하고 협상력도 제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 북부 시리아 철군을 발표하자 터키는 바로 쿠르드족을 공격했다. 외신은 양측의 전투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일부는 너무 참혹해 국제적으로 금지된 백린탄에 피폭된 의혹이 있다고 전했다. 슬픈 역사를 지닌 쿠르드족은 제노사이드(종족 대량학살)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 IS 격퇴에 선봉이었던 쿠르드족은 미국에 무자비한 배신을 당한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힘의 공백이 생겼다. 잽싸게 러시아가 쿠르드족에 접근하고, 쿠르드족은 생존을 위해 적군인 시리아 아사드 정권에 손을 내밀고 있다. 복잡한 중동 역학관계에서 관련 강대국과 당사국들의 어제오늘의 말이 다르고, 누가 누구의 편인지도 헷갈릴 정도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결정은 중동 정세를 불안하게, 참혹한 사상자가 발생하게, 관련국들이 생존과 국익을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계산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트럼프의 철군 결정은 중동 불개입 정책의 신호인가.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분석하는 미국의 유력지들도 있다.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명분이야 그럴듯한 고립주의지, 실상은 미국의 이익이고 트럼프의 이익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동맹을 외교적·전략적 자산이라기보다는 채권·채무 관계로 인식하는 트럼프다.

미국의 결정과 그 배경을 한반도와 동북아에 적용해 보자. 세 차례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으나 북핵은 아직 성과가 없다. 협상 중지 동안 북한은 중거리미사일을 마구 쏴댔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까지 하며 영리하게 전략무기급 완성도를 높였다. 미국은 협상 재개를 위해 용인했다. 이 와중에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미시건대 강연(6일)에서 비핵화 실패의 경우 아시아의 핵 확산을 경고하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말을 소개하면서 “북핵이 미사일 발사 거리 안에 있으면 (개발 능력이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핵 능력 제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비핵화 실패를 언급했고, 한·일의 핵무장 가능성이 배어 있다. 이례적인 언급이다. 협상 동력을 위해 북·중에 경고용 애드벌룬을 띄웠다고만 볼 수 있을까.

미국 외교 정책은 늘 국내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개별 국가 입장에서 보면 자국에 미칠 영향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미국 백인 중하류층 노동자의 생각이 반이민, 무역전쟁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탄핵 시도가 미국의 북핵정책을 아주 후순위로 밀어버릴지, 선거를 앞두고 가시적 성과를 위해 더 강력하게 추진될지 알 수 없다.

무관중 국제 축구경기 같은 비정상을 아무 일 아닌 듯 하고, 수 틀리면 연평도 도발 같은 행동이 일상화된 집단이 북한이다. 그런 집단을 어찌어찌 달래가며 여기까지 끌고 온 이 정권의 대북정책을 대북 저자세 등 논란은 있지만 일정 부분 평가해 줄 수 있다. 좋은 결과를 위한 선의로 이해해서 말이다. 그러나 선의가 좋은 결과를 절대로 담보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라고 한다. 그런 선의로 충만한 대북정책과 미국의 이익을 위한 미국의 독단적 결정이 합쳐져 궤도를 이탈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의 핵우산 정책은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인정되고, 미국이 세계 전략에 따라 핵우산 정책을 조금이라도 변경한다면 한반도에서의 핵 억지력은 어떻게 되는가. 그럴 때 북한의 행동은 무엇인가. 이미 북한은 미국과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협상을 하자는 태도다. 미국이 동북아에서 한 발짝 물러난다면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주판알 튕기기는 어떤 방향으로 향할 것인가. 한반도 운명이 한국의 영향력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정해질 가능성은 없나. 한·미가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시작했다. 이미 연합훈련이나 전략자산 전개 비용을 포함해 5조원까지 내라는 보도가 나왔다. 동맹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한·미의 간극은 벌어져 있는 것 같다.

이젠 우리에게도 한반도 운명에 대한 지렛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쉬운 소리 해가며 중재자 역할을 했는데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전략도 검토해야 한다. 그 지렛대는 핵 정책의 변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화 프로세스만 고집하는 이 정권이 유연하고도 대국적 견지에서 핵 개발 검토를 포함한 핵 정책 변경을 검토할 리는 없다. 그러나 전략가·전문가들은 다양하고 부정적인 상황을 가정해 핵 정책 변경을 검토·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이념 문제도 아니고, 보수 야당 일부의 주장이라고 뭉갤 것도 아니다. 생존 전략과 국가 이익에 관한 것이고 협상력 제고와도 관련 있다. 핵 개발의 장단점을 냉정하고 치밀하게 따져 보고 튼튼하고 다양한 지렛대들을 만들어야 한다. 늘 외세에 휘둘리고, 북한과 중국에 제대로 말도 못하는 국가로 전락할 수는 없다. 슬픈 민족 쿠르드족처럼 되지는 말아야 한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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