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김천식] 남북관계의 현실을 직시하자

국민일보

[국민논단-김천식] 남북관계의 현실을 직시하자

입력 2019-10-22 04:01

이벤트 화려하고 떠들썩했으나 정부의 정세 오판으로
북핵 위협 더 심각해졌고 남북 간 신뢰는 제로 상태
우리 위상과 국익 지키려면 발상을 새롭게 하고 정책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우리는 지금 정작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 몇 달 동안 온 나라가 어떤 엉뚱한 사람 때문에 난장판이 됐다. 주변정세가 돌아가는 것과는 동떨어진 이상한 일이었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제정신 차리고 이 문제를 심각하게 짚어보기 바란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증진하고 남북한 간의 신뢰를 구축하며 관계를 개선해서 통일에 가깝게 가고자 노력한다. 그 진정성은 의심할 바 없다. 역대 모든 정부가 그러했다. 정부로서는 잘하겠다고 약속하고 잘 돼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정부가 정작 평가받아야 할 것은 그 노력이나 진정성이 아니라 성과이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북한의 핵 위협은 더 심각해졌다. 이벤트는 화려하고 떠들썩했으나 북한은 핵 폐기를 위한 어떠한 행동도 취한 바 없다. 안전이 담보된다면 핵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북한의 말에 기초해서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을 각각 세 차례 그리고 여러 차례 비핵화 협상이 진행됐지만 현재까지 비핵화나 안전보장의 개념조차도 모호하다. 우리 국민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기대하면서 정부의 남북 관계 개선 노력과 정상회담을 지지했다. 남북 정상회담이나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한의 비핵화에서 큰 진전이 있고, 조만간 완전히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정부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 위협은 더 증강돼 역대 최악이 됐다. 북한은 2017년 9월 6차 핵실험으로 더 이상 실험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핵무기를 완성했고,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개발해서 핵 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금년에는 우리의 방어수단으로는 막아낼 수도 없다는 신형 미사일들을 쏘아대며 맞을 짓을 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있다. 핵탄두가 완성됐고, 그것을 실어 나를 미사일을 막을 수 없다면 우리는 북한의 핵 위협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는 것이다. 남북한 간 군사적 균형이 기울어진 것은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 북한이 어떤 도발을 할지 알 수 없다. 이런데도 평화가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다거나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고 말하지 말라.

남북한 간의 신뢰는 영(zero)이다. 우리 축구국가대표 선수단이 지난 15일 평양에서 경기를 했다. 응원·취재·중계는 고사하고 연락 두절 상태로 우리 선수단이 안전한지 국제규범에 따라 경기는 치러졌는지 경기운영은 어땠는지 알 수 없는 해괴한 경기를 했다. 국가대표들이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과거 남북 관계에서 이러한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북한 지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창궐해도 공동방역은커녕 정보교환도 안 돼 휴전선 인근 남쪽 지역의 돼지들이 소멸되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남북한 간에는 접촉과 대화, 교류와 협력이 없으며 개성에 설치된 남북연락사무소도 기능 정지 상태다. 민간 차원의 교류도 거의 없다. 우리가 문을 두드려도 북한은 꿈쩍하지 않고 고압적이다.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겁먹은 개’ 등의 천박한 말로 비난한다. 작년 백두산에 올라 함께 손잡고 만세 부르며 환호하던 그 북한이 맞는가.

문 대통령이 대화를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북한은 앞으로 대화는 미국과 할 것이며 남측 당국자들과 마주 앉을 생각이 없다고 거부한다. 문 대통령의 평화경제 구상에 대해서도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일이라고 조롱한다. 쌀 5만t 지원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 핵시설을 폐기한다는 합의는 물론 여러 가지 남북협력 사업이 하나도 이행된 것이 없다. 이것이 또한 대남비난의 빌미가 되고 있다. 정부가 정세를 오판한 결과이다. 이제 남북한 관계가 잘 될 것이라거나 신뢰가 돈독해졌다고 말하지 말라.

한반도 외교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 외교가 북핵 문제에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핵을 손에 쥔 당사자들끼리 주도하고 있으며, 핵이 없는 한국은 가장 크게 위협받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핵 외교에서 배제되고 있다. 북한은 이제 핵무장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략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자평하며, 미국과 직접 상대하여 필요한 문제들을 논의할 것이라고 한다. 북한은 이 논의에 문 대통령은 끼어들지 말고 빠지라고 공박한다. 이 판에서 문 대통령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은 모든 것을 미국과 담판하여 타결하고 남북 관계는 그 종속변수로서 풀어가겠다는 태도이다. 과거에도 북한은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상대하여 한반도 문제를 논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미국은 남북한이 당사자임을 강조하며 북한과의 협상을 거부했다. 그런데 이제 북한은 핵무기를 지렛대로 중요한 한반도 외교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미·중·일·러 등 주변국이 남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북한의 핵무장 완성 전후로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살벌한 국제정치에서 우리의 위상과 국익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발상을 새롭게 하고 정책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할 정세이다.

김천식 전 통일부 차관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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